
에이즈(AIDS)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조명환(64) 건국대학교 생명과학특성학과 교수에게 새로운 직함이 하나 붙었다. 국내 최대 국제구호단체 한국 월드비전의 신임 회장이다. 조 교수는 오는 2021년부터 한국 월드비전의 수장으로 국내외 구호 사업을 이끌게 됐다. 3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 교수는 후원이 불러올 변화에 대해 확신에 차 이야기했다. 그 또한 과거 구호단체의 후원을 받던 아동이었다.
후원받았다는 사실은 60년이라는 긴 시간 숨겨왔던 이야기다. 가난은 부끄러웠고 혹시라도 부모를 욕되게 할까 두려웠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을 피해 북에서 내려온 가난한 실향민이었다. 중학교 2학년, 등록금을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났던 서러움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후원자와의 인연은 그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맺어졌다. 미국 네브래스카주 세인트폴에 거주하는 미국인 에드나 넬슨씨는 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해 그에게 분유와 장난감 등을 전달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애정이 담긴 편지와 함께 매달 15달러를 보냈다. 편지의 말미에는 늘 ‘God loves you. Trust his love. I pray for you.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그의 사랑을 믿어라. 너를 위해 기도한다)’라는 문장이 담겼다. 조 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 노력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다. 결국 대학에서 쫓겨나 좌절했을 때에도 ‘에드나 어머니’의 지지는 나를 다시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회상했다.

조 교수와 넬슨씨의 실제 만남은 지난 1995년에서야 이뤄졌다. 조 교수는 “미국 유학 기간 몇 번이나 에드나 어머니를 찾아가려 했지만 번번이 거부하셨다”며 “건국대 교수로 부임한 후 더 늦으면 뵐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씀드리지 않고 무작정 찾아갔다. 그때 당시 에드나 어머니의 나이는 99세였다”고 말했다. 넬슨씨의 거주지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조 교수는 “에드나 어머니의 형편이 넉넉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며 “초등학교 교사 은퇴 후 편의점에서 일하셨다. 100년을 넘게 사셨지만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타보지 않은 가난한 시골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가난한 사람도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은 케네디스쿨 졸업 후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학회장이 되면서 실현됐다. 면역학 박사였던 그는 과학자로서 신약을 개발해도 가난한 이들에게 약이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목격했다. ‘현장의 과학자’로서 발로 뛰어야 에이즈를 퇴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치료를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에이즈 퇴치 기부금을 모았다. 각국의 정치인과 기업가, 반군 지도자와의 만남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통 없는 후원금’도 그가 중점적으로 고려 중인 사업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8개국에서는 비행기 티켓 요금에 1000원씩 국제의약품구매기구 기부금이 붙는다. 지난 5년 동안 약 2조원이 기부금으로 모였다. 이를 통해 전 세계 에이즈·말라리아·결핵 어린이 환자 100만명이 무료로 치료받고 있다. 조 교수는 “기업과 접촉해 4000원짜리 커피에 기부금을 더해 4001원에 판매하거나 3000만원 짜리 자동차를 구매할 때 1만원을 기부받는 방식 등을 구상 중”이라며 “누구나 생활을 통해 기부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눈을 반짝였다.
soyeon@kukinews.com /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