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몹시 싫어하고 미워함’을 뜻한다. 이제 이 감정은 단순한 정서를 넘어 일상의 언어이자 놀이처럼 소비되는 시대가 됐다. 조롱은 ‘밈’이 되고, 차별은 유머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좀먹는 독성이 자리한다. [혐오의 시대] 시리즈는 혐오가 정치, 외교, 문화, 법 제도 등 사회 전반에 스며드는 현상을 경계하며 혐오 표현의 일상화와 놀이화를 짚고, 혐오를 넘어 공존의 사회를 위한 제도적·사회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

정치 구호, 온라인 커뮤니티, 거리 현수막까지. 혐오 표현은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를 제어할 제도적 장치나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빈약하다. 혐오는 사람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말이지만, 한국 사회는 이를 감지하고 대응할 법과 감각을 갖추지 못한 상태다. 독일과 일본은 법과 지역 공동체를 통해 혐오에 대응해 왔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24시간 내 삭제하라”…혐오를 공공질서 침해로 본 독일
독일은 혐오 표현을 ‘표현의 자유’가 아닌 공공질서 침해 행위로 본다. 2017년 제정된 ‘네트워크 집행법(NetzDG)’은 SNS 사업자에게 혐오성 게시물을 24시간 이내 삭제하도록 의무화했고, 이를 어길 경우 최대 5,000만 유로(약 73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형법 제130조는 인종·민족·종교 집단에 대한 증오 선동을 3년 이하 징역형으로 처벌한다. 나치 범죄 부인에서부터 현대의 극우주의, 반이민 정서까지 포괄하며, 혐오 표현을 민주주의 위협 요인으로 규율한다.
다만 독일의 혐오 표현 규제법도 완벽하지는 않다. 플랫폼이 벌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신고만 들어오면 무분별하게 콘텐츠를 삭제하는 ‘오버블로킹’ 현상이 지적되고 있다. 이로 인해 합법적이거나 논쟁적일 뿐인 콘텐츠까지 삭제되면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 발언이나 비판적 의견이 ‘반유대주의’ 또는 ‘혐오 발언’으로 분류되어 삭제되는 사례가 늘면서, 정치적 논쟁까지 억압될 수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지방정부가 앞장선 일본…혐오 대응의 분권 모델
일본은 2016년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을 제정해 중앙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지만, 실질적 변화는 지방정부에서 이뤄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와사키시다. 이 도시는 2019년 ‘혐오 발언 금지 조례’를 제정해 공공장소에서 특정 민족이나 국적을 비방하는 행위를 원천 금지했고, 위반 시 형사처벌도 가능하도록 했다. 오사카시 등 다른 지자체들도 상담 창구 운영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혐오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접근은 혐오 표현 규제를 ‘분권형 공공질서’로 관리하는 모델로 평가된다.
한국은 아직도 “넘긴다”…제도도, 공감도 없다
한국에서는 아직 혐오 표현을 직접 규율하는 법률이 없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와 왜곡, 이주민·장애인·여성에 대한 온라인 조롱과 혐오가 빈번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처벌할 법적 근거는 부족하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부르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발언이 반복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지만, 이를 직접 처벌하는 특별법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명예훼손 등 기존 형법을 적용해도 실질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리포트’(2016, 2019)와 인권통계(2023)에 따르면, 이주민, 장애인, 여성 등 다양한 집단이 일상에서 혐오표현의 피해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시기 이주민에 대한 혐오표현이 증가했다. 장애인과 여성 역시 온라인에서 반복적으로 조롱과 혐오 발언을 겪고 있다. 실제로 일부 신문 보도와 시민사회단체 자료에서는 이주민이 택시나 대중교통에서 ‘코로나’라고 외치며 모욕당하는 등 구체적 피해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UN Committee on Elimination of Racial Discrimination)는 최근 한국 정부에 “혐오 표현 규제와 인종차별 금지에 대한 실질적 법제도 마련”을 공식 권고(2025년 5월7일)했다. 특히 이주민, 난민,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혐오와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이를 정의하고 금지할 법적 장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2021년)에 따르면 절반이 넘는 국민이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접했지만, 대부분 ‘그냥 넘겼다’고 답했다. 신고해도 조치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여전히 크다.
코로나19 이후 특정 집단을 겨냥한 혐오 유발 보도와 댓글이 확산되며, 미디어의 책임과 자율규제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혐오 유발 보도와 댓글의 실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언론보도가 혐오 담론을 확산시키는 중심 역할을 하며, 재난 상황에서는 혐오 생산이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혐오 유발 보도 방지 가이드라인 등 정책적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플랫폼 자율규제와 정부 규제의 조화, 그리고 한계
혐오 표현 규제는 플랫폼의 자율규제와 정부의 제도적 규제가 조화를 이룰 때 효과적이다. 하지만 기술적 차단만으로는 혐오 표현을 완전히 막을 수 없고, 표현의 자유와의 균형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법과 제도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교육을 통해 혐오 표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는 법을 통해 가치 기준을 정해주면 시민들이 그 기준을 잘 따른다는 특성이 있다”며 “법의 제정은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중요한 과소 결정입니다. 처벌 위주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과 가치 변화가 결국 다수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인식 확산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법과 사회적 감각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공존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며 “대선을 마친 직후부터 사회적 공감과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혐오를 넘기 위한 출발점은 ‘기준’과 ‘공감’
혐오 표현을 방치하는 사회는 결국 신뢰와 공존의 기반을 잃는다. 독일과 일본의 사례는 법과 제도가 사회적 감각과 결합할 때 혐오 확산을 막고 공존의 토대를 세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독일의 경험처럼 혐오 표현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정치적 논쟁까지 억압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혐오 표현 규제는 법과 사회적 감각, 두 축의 균형이 중요함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필요한 것은 혐오를 제어할 명확한 기준과 이를 실천할 사회적 공감이다. 대선 이후 사회적 공론화와 가치 변화의 흐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지금, 혐오를 넘어 공존의 사회로 함께 나아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