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시험대 오른 韓·美, 국익 지키는 냉철함 필요하다 [데스크 창]

동맹 시험대 오른 韓·美, 국익 지키는 냉철함 필요하다 [데스크 창]

기사승인 2025-09-18 09:31:41
한때 미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 철강, 항공을 앞세워 전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며 압도적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사뭇 다르다. 국내총생산(GDP)의 70%가 소비에서 나오고, 제조업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다. 값싼 해외 상품을 달러로 사들이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생산의 나라’에서 ‘소비의 나라’로 체질이 바뀐 것이다.

이 변화는 국제 경제 질서가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은 정부 지원과 각종 보호 장치를 동원해 수출을 늘렸고 한국, 대만, 중국도 뒤를 이어 제조업을 국가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다. 미국은 이들 국가의 상품을 받아들이는 대신 달러를 내줬다. 미국 소비자는 값싼 물건을 누렸고, 대미 교역에서 흑자를 기록한 국가는 남긴 달러로 미 국채를 사들이며 미국의 적자를 메웠다. 압도적 군사력과 기축통화 지위를 바탕으로, 미국은 제조업 비중을 줄이고도 소비 중심 경제를 굴릴 수 있었다.

균열은 중국의 부상과 코로나19 확산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며 인공지능, 첨단 반도체, 전기차에서 미국을 추격했고 미 국채 매각을 늘리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는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며 미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을 드러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와 보편·상호관세 정책은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등장했다. 미국이 번영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제조업 육성을 앞세운 것이다. 단순히 ‘장사꾼 트럼프’의 계산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제조업 쇠퇴와 공급망 불안을 되돌리려는 미국 사회 내부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역시 제조업의 공급망에서 외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정책에 집중하기도 했다. 유럽연합(EU)마저 이러한 흐름을 타고 ‘바이 유러피언(유럽산 우선 구매)'을 내세우며 자동차·반도체·방위산업 육성에 나서는 상황이다. 

문제는 미국의 전략이 한국을 비롯한 동맹까지 압박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관세 인하를 위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을 내놨고 삼성, 현대차, LG 등 주요 기업들은 미국 전역에 공장을 지었거나 건설 중이다. 

사실 한국 기업 입장에서 미국은 결코 ‘투자의 천국’이 아니다. 몇 달 전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국내 기업이 미국 내 공장 설치를 주저하는 이유에 대해 “돈이 아니라 인력 문제”라고 단언했다. 인건비는 한국보다 비싸고, 숙련된 제조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주요 자재와 부품도 상당 부분 해외 조달에 의존해야 한다.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지난 9월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서 벌어진 한국인 근로자 300여명 집단 구금 사태는 이 구조적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수십조 원을 쏟아부어도 정책 불확실성과 이민 규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구금된 기술자들은 사실상 강제 수용 상태에서 8일 만에 귀국했고, 공장 완공은 최소 2~3개월 이상 늦춰질 전망이다. 다른 대형 프로젝트들도 인력 공백과 규제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관세 압박, 투자 요구, 이민 규제와 인력 부족이 얽힌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한국이 취할 해법은 분명하다. 조급하게 양보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냉정하게 협상하는 것이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조선업 등에서 이미 세계가 인정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관세와 투자 강요로 이어지는 트럼프식 전략은 결국 동맹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제조업 부활은 관세와 압박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우리는 흔들림 없는 기술력으로 버티며 국익에 부합하는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길이자, 한국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이 될 것이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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