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장엄한 2.8 독립 선언에 히비야 공원은 조선 청년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결의문에는 우리 겨레의 생존과 발전, 동양 평화를 교란하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과 우리 겨레의 운명을 정할 기회를 줄 것, 만국 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겨레에도 적용할 것,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 의지를 담았다.
1919년 일본 도쿄, 도쿄의 심장인 일본 황국 바로 코앞에 있던 히비야 공원에서 목숨을 건 조선 청년들의 독립 선언이었다. 히비야 공원에 모인 조선 청년은 약 600명이었고 그중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위해 생명을 내건 이 선언은 거족적이며 평화적인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3.1운동은 국외에 거주하던 한국 민족에게는 독립의 의지를 전파했고 전 세계에 비폭력 저항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1932년 4월 27일, 홍커우 의거를 이틀 앞둔 날.
윤봉길은 홍커우 공원을 걷는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을 맞아 상해 점령 승리 기념 축하 행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윤봉길 의사는 의거를 다짐했다. 그리고 현장을 답사하며 '답청하며'란 시를 지었다.
무성한 봄풀들이여
내년에도 봄기운 돌아오거든
왕손과 더불어 같이 오게나
푸르른 봄풀들이여
내년에도 봄기운 돌아오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봄풀들이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공원은 평화로웠다. 초록의 봄풀은 바람에 물결을 이룬다. 현장 답사를 위해 공원을 걸으며 발밑 짓밟히는 풀들을 느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기에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걸음 수를 재었다. 걸음마다 짓밟혀 일어서는 풀과 그렇지 못하는 풀들이 있다. 인간 역시 강한 자로부터 유린당하였을 때 이 풀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윤봉길은 유린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일어서 “곧 올 내일은 다시는 살아있지 못할 오늘이 될 것이다”라고 읊조리듯 항거의 의지를 다진다.
홍커우 공원 의거로 가와바타 거류민단장과 시라카와 육군 대장 등 7명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고,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상하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 후 가나자와 육군구금소에 이송된 12월 19일, 24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산 시영공동묘지(노다야마 공동묘지) 가장자리의 쓰레기 소각장에 암장되었다. 노다야마 공동묘지는 서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서 전사한 육군 장병들의 묘역으로 적국의 장병들 아래 아주 낮은 음지에 암장되어 사후까지 적국과 저항의 시간을 보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장제스의 임시정부 지원에 영향을 주었고, 1943년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독립을 공론화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던 용기는 우리에게 어떤 배움이 됐을까?
수없이 많았던 외침에서 자주독립을 지켜냈고, 6.25 전쟁 이후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했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IMF 금융위기를 극복했으며, 독재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했고 계엄 상황에 하나 된 힘으로 평화를 지켜냈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역사를 잊지 않고 직시하는 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2.8 독립 선언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