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공급망 불안과 글로벌 무역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이 외국의 약가 정책에도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업계는 외부 변수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약가 조정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8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미국제약협회(PhRMA)는 최근 한국을 포함한 9개국과 유럽연합(EU)을 ‘미국산 의약품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자국 산업에 피해를 주는 국가’로 지목하며 미국 정부 측에 무역 협상을 통한 약가 정책 개선을 촉구했다. 의약품 소비가 많은 이들 국가를 미 정부가 가장 우선해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다.
PhRMA가 미 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한국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한국 시장 진입을 원하는 미 제약사들에 대해 수많은 평가 과정을 거치도록 요구해 환자에게 신약을 판매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주장했다. USTR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따라 외국 정부의 불공정한 약가 정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PhRMA는 또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신약 예산 비율은 OECD 국가 중 최저라고 했다. 한국의 GDP 대비 신약 예산은 0.09%로 미국(0.78%), 스페인(0.53%), 이탈리아(0.46%), 일본(0.4%)보다 낮았다. 미국 최대 재계 단체인 미국상공회의소도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약가를 낮게 책정해 혁신 신약에 보상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낮은 약가는 해외 혁신 신약 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PhRMA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최근 10년간 전 세계에서 개발·허가된 혁신의약품 408개 중 급여 적용 후 한국에 도입된 치료제는 35% 정도에 불과하다. 외국계 신약이 국내에 도입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년이다. 세계에서 첫 출시 후 1년 안에 한국에 진입하는 신약은 비급여 도입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5%에 그친다. OECD 국가 평균 신약 도입률이 18%인 것과 비교하면 3배 넘게 차이 난다.
미국의 관세 압박에 따라 의약품 수출입 부담은 앞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미국은 지난 4월9일부터 각 교역상대국에 10%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또 대미 무역흑자 규모가 큰 국가를 상대로 상호관세 최대 36%(한국은 15%)를 추가로 매기기로 했다. 상호관세와 별개로 의약품 등에도 품목관세 부과를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12일 ‘최혜국대우(MFN) 약가 정책’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미국은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제약산업 이익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외국 정부가 신약 가격을 비정상적으로 낮게 책정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정부가 약가 조정 압박에 나설 경우 중증 희귀·난치질환 환자들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예측 가능한 약가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해외사업 담당 업계 관계자는 “환율 급등과 물류비 증가로 수입 원가가 치솟고 있는데 현행 약가 산정 체계는 이를 반영하지 못해 일부 치료제의 공급이 중단될 우려가 크다”면서 “의약품 공급 불안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더 이상 획일적 약가 통제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최소한 희귀질환 치료제나 필수의약품에 한해 시장 상황을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약가 조정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미국 제약업계가 자국 내 약가 인하 정책엔 투자 위축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외국엔 약가 인상을 요구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는 4일 논평을 통해 “트럼프와 다국적 제약사의 압박은 국민 건강을 위한 공공 시스템을 훼손하려는 시도”라며 “혁신성 반영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는 약가 인상 제도는 환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 다국적 기업을 위한 정책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약제비 지출을 구조적으로 낮추기 위한 새로운 정책 수립이 시급한 시점이다”라고 부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