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거시건전성정책에서 한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은은 주요국과 달리 감독권이 없어 정책 대응력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새 정부의 금융감독체계 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금융당국 안팎에서 신경전이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이 총재는 16일 서울 중구 한은 별관에서 열린 한은·아시아개발은행(ADB)·국제통화금융저널(JIMF) 공동 컨퍼런스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중장기적으로는 중앙은행의 거시건전성 역할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적·제도적 장치를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거시건전성 정책은 금융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목표로 자산가격 급등, 과도한 신용팽창, 시스템 리스크 등 금융 불균형을 예방·완화하는 정책을 뜻한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대출 규제와 은행 자본 및 유동성 규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 총재는 “한은은 주요국과 달리 직접적인 거시건전성정책수단과 미시감독 권한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와의 조율 과정에서 정책 강도나 방향에 대해 이견이 있을 경우 정책대응의 신속성과 유효성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의 발언은 한은이 거시건전성을 관리할 수 있는 정책 수단과 금융기관에 대한 단독 검사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전한 것의 연장선이다. 한은은 최근 국정위에 “한은에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의 이중 책무가 부여돼 있으나, 금리 이외에 금융 불안에 미리 대응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확보돼 있지 않다”며 한은이 관련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은은 금감원에 금융기관 검사나 공동 검사를 요구할 수 있지만 단독으로 검사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레고랜드 사태, 새마을금고 대규모 인출 사태 등 비은행 기관의 리스크가 금융시스템 전반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졌다. 한은은 비은행 기관을 상시 감독하고 사전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감독권이 없는 현 체계에서는 은행과 비은행권 금융기관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어려워, 주요 정책 판단에서 오판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해외 주요국은 이같은 점을 고려해 중앙은행에 은행 감독권한을 둔 경우가 많다.
그간 한은은 거시건전성정책과 통화정책 간의 엇박자, 비은행권 비중 확대에 따른 금융안정 관리의 한계를 꾸준히 지적해 왔다. 여기에 새 정부가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본격화하자, 한은은 권한 강화를 위해 목소리를 키우는 모습이다. 이 총재는 지난 10일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기자간담회에서도 “한은이 목소리를 높여서, 정치적 영향 없이 거시건전성 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할 수 있는 지배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금융감독원은 조직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금감원 고위 간부들은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실을 찾아 ‘금융감독 기능·권한 재배치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금융정책과 감독 기능이 분리될 경우 금융감독 기능은 금감원 중심으로 일원화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금소처의 경우 별도 기관으로 분리·격상 대신 금감원 내에서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