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국내 비대면진료 논의는 여전히 대상 질환이나 초진 여부 등 허용 범위에 대한 조건 논쟁에 갇혀 있다. 비대면진료는 지난 2020년 한시적 허용 이후 시범사업 형태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논의는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규제 강화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계적 디지털 헬스케어 경쟁에서 한국은 구조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의료는 단순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전문성과 특수성을 가진 영역이다. 진료는 의료인의 임상적 판단, 책임, 환자 맞춤형 의사결정을 아우르는 고도의 전문 행위다. 따라서 어떤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의료행위의 중심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대면진료와 AI가 결합할 경우 의료적 확장성은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면 AI 기반 문진 자동화로 진료 전 정보를 구조화하고, 의료진은 핵심 판단에 집중할 수 있다. 영상·음성 데이터 기반 진단 보조 알고리즘은 특정 질환군에서 진단 일관성과 정확도를 높인다. 복약 알림, 순응도 모니터링, 맞춤형 생활습관 코칭 등 진료 이후 환자 관리를 체계화할 수 있다. 생체 데이터 또는 라이프로그 데이터를 활용한 이상징후 조기 감지도 가능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로 구현해나가고 있다. 미국의 헬스테크 기업인 힘즈앤허스(Hims & Hers)는 최근 ‘MedMatch’라는 AI 기반 임상 보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환자의 건강설문과 이력을 바탕으로 수백만 건의 진료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약물 종류와 용량, 제형을 자동 추천하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불안, 우울 등 정신건강 영역부터 적용했으며, 현재 환자 만족도, 증상 완화율, 치료 도달 속도 등 임상 지표를 근거로 확장 가능성을 검증 중이다. 이 시스템은 의료진의 전자의무기록(EMR)과 연동해 행정 부담을 줄이고, 의료인이 본질적 판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러한 기능들은 의료기관 접근이 어려운 환자에게 새로운 의료 접근 기회를 제공해 건강권을 신장시키고, 만성질환자에게는 정밀한 추적 관리 체계를 만들어주는 발판이 된다. 또 축적한 데이터는 정밀 의료, 임상 연구, 신약 개발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어느새 플랫폼은 의료인과 환자 간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의료인의 임상 판단과 환자의 의사결정을 돕는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방대한 데이터는 의료 AI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적 학습 자원이다.
우리가 초진, 재진 같은 구시대적 논의에 머무는 동안 쌓여있는 데이터의 시의성과 활용 가치는 계속 저하되고 있다. 이는 결국 의료 AI 경쟁력의 하락, 나아가 국가 헬스테크 산업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허용 범위’에 대한 논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나서서 비대면진료를 규제와 제한의 대상이 아닌, 의료 분야의 미래 먹거리이자 국민이 기술 혜택을 체감할 수 있는 신산업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국민에게는 의료 선택권을, 산업에는 성장 기회를 보장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 지금이 그 결정적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