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정자 문화의 본고장인 봉화군에서 자연과 예술, 문화유산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프로젝트가 막을 올린다.
19일 봉화군에 따르면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전통 건축물인 정자의 미학을 바탕으로 현대 예술 창작과 지역 문화가 교차하는 새로운 시도를 담은 ‘누정愛아티스트’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서양화가 김창한을 첫 초대 작가로 맞이해 봉화와 정자의 풍경을 현대 회화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단순한 전시 차원을 넘어 봉화의 전통과 자연, 그리고 주민의 참여가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봉화, 누정 문화의 심장부
누정(樓亭)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다. 이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닌 정신세계와 미적 취향을 집약한 공간이자 한국 지성사와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봉화군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03개의 누정이 분포한다. 청암정, 한수정, 몽화각 등 수백 년을 버텨온 정자들은 청량산과 백천계곡, 띠띠미마을 같은 수려한 자연 속에 자리하며 봉화 특유의 정신문화와 조화로운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특히 봉화에 많은 정자가 남아 있는 배경에는 단순히 양반 세거지라는 조건만이 아니라 청량산과 문수산이 제공하는 독특한 자연환경이 있었다. 풍류와 사색의 터전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이곳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정신의 깊이를 확장해 나가던 생생한 현장이었고, 그 미학과 사유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술가와 지역 문화가 만나는 레지던시
‘누정愛아티스트’ 레지던시는 일정 기간 예술가가 특정 지역에 머물며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작가에게는 온전히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지역에는 예술적 활력을 불어넣는 상생의 장을 제공한다.
최근 여러 지역에서 레지던시는 단순한 예술가 지원을 넘어 문화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 예술은 지역과 교차하며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주민과의 교류 속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확장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봉화군의 시도 역시 전통 건축물과 현대 예술을 결합해 정자 문화의 현대적 계승을 모색하는 새로운 실험이다.

풍경화가 김창한, 봉화를 화폭에 담다
프로그램의 첫 주인공은 야외 풍경 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서양화가 김창한이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후 30여 년간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그는 국내외에서 50여 회 이상의 개인전과 200회가 넘는 단체전에 참여해왔다.
그의 이력은 봉화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외가가 봉화였고 부친 역시 봉화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역과 인연을 이어왔다. 이런 배경은 김창한 작품이 담고 있는 자연과 고향에 대한 서정적 감수성으로 연결된다. 그의 풍경화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독일, 일본, 호주, 캐나다 등에서도 전시돼 자연과 삶의 정서를 교류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번 레지던시에서 김창한은 2025년 여름부터 2026년 봄까지 4회 이상 봉화를 방문하며 정자와 산수, 마을 풍경을 소재로 대형 회화 작품과 소품 등 약 25점을 제작한다. 이러한 창작은 단순한 풍경 기록을 넘어 봉화 정자의 미학과 현대 회화의 조우라는 의미를 지닌다.
창작의 거점, 솔향촌과 누정갤러리
김창한의 작업 거점은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내 숙박 공간 ‘솔향촌’이다. 이름처럼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한 숙소는 향긋한 솔향과 고즈넉한 풍경이 예술가에게 몰입의 시간을 제공한다.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경은 창작의 영감을 자극하는 이상적인 터전이 된다.
완성된 작품들은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내 누정갤러리에서 전시된다. 누정갤러리는 전통적 미감과 현대적 전시장 구조가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으로 2023년 개관 이후 봉화의 새로운 예술 발신지 역할을 하고 있다. 내년 5월 말부터 약 3주간 열릴 김창한의 개인전은 봉화 정자 문화와 회화가 만나는 상징적 장이 될 예정이다.
주민과 함께하는 예술의 실험
‘누정愛아티스트’는 소통 없는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김창한은 프로그램 기간 중 지역 주민과 관람객을 대상으로 오픈스튜디오, 드로잉 클래스, 작가와의 대화 등을 개최해 주민이 창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다.
창작 과정은 SNS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전국에 소개된다. 봉화군은 이를 통해 예술·관광·문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지역 브랜딩 모델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봉화군 관계자는 “정자라는 전통 공간에서 탄생한 작품은 봉화의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전달할 매개체가 될 것”이라며 “향후 사진·음악·영상 등 다양한 장르 예술가로 확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