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외교’의 결실, 경주서 확인한 韓산업의 저력 [데스크 창]

‘기술 외교’의 결실, 경주서 확인한 韓산업의 저력 [데스크 창]

기사승인 2025-10-30 10:59:53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경제포럼인 ‘2025 APEC CEO 서밋’의 개막 열기로 분주했던 하루가 저물 무렵, 재팬 모빌리티쇼 취재를 위해 출장을 간 후배 기자로부터 ‘[속보] 한미 무역 합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에서 장기화된 통상 교착이, 지난 7월30일 관세 협상을 위한 큰 틀에 합의한 이후 3개월 만에 해소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한 줄의 소식은 이날 APEC의 의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한국 산업이 ‘기술로 세계와 대화한’ 무대이자, 그 ‘기술 외교’가 실질적 성과로 이어진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 내용을 보면, 한국은 총 대미 투자액 3500억달러(약 497조원) 중 현금은 2000억달러(약 284조원)로 잡고, 연간 현금 투자 상한액을 200억달러(약 28조원)로 설정했다.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한 마스가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1500억달러(약 213조원)는 한국 기업 주도로 추진키로 했다. 투자는 우리나라 기업의 직접투자(FDI)와 보증 등을 포함해 조성한다. 일단은 안도다. 우리나라에 대한 상호 관세는 15%로 유지하고, 자동차 관세의 경우 25%에서 15%로 낮아져 국내 완성차 수출도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정치가 외교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문을 통과시킨 것은 결국 기술이었다. 인공지능(AI) 반도체와 조선, 방산, 자동차 등 각 산업의 경쟁력은 이번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는 근거가 됐다. 그리고 바로 이날 경주 APEC 현장은 그 기술력의 실체를 증명하는 무대가 됐다.

실제 APEC 현장에서 한국 기업들은 자국 산업의 기술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두 번 접히는 ‘갤럭시Z 트라이폴드’를 내놨고, LG전자는 세계 최초의 무선·투명 TV ‘시그니처 올레드 T’로 혁신의 미학을 제시했다. 

HD현대는 인공지능(AI) 조선 기술로 해양산업의 미래를 보여줬고, 한화는 방산과 우주 기술을 결합한 ‘평화를 위한 기술’을 강조했다. SK그룹은 AI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구성하는 냉각·반도체·보안 기술을, 현대자동차그룹은 수소 모빌리티와 로보틱스 기술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번 APEC은 한국 산업이 더 이상 ‘생산 중심’이나 ‘수출 중심’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줬다. 기업들은 독자 기술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기업과 정부 간 협력을 통해 미래 산업의 구조를 함께 설계하고 있었다. 기술 외교가 추상적 구호를 넘어, 실제 통상 성과로 이어지는 과정이란 것을 증명한 셈이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다.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 미·중 기술 패권 경쟁, 환경 규제 강화 등 한국 산업이 직면한 변수는 여전히 복잡하다. 그러나 이번에 경주에서 확인된 것은,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기술 경쟁력과 한국 산업의 자부심이었다.

이 자신감을 지속 가능한 경쟁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전략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기업의 기술 외교가 세계 무대에서 결실을 맺으려면, 정부는 규제 완화와 인재 양성, 글로벌 공급망 정책 등으로 산업 생태계를 든든히 받쳐줘야 한다.

민간의 혁신과 공공의 전략이 맞물릴 때, 한국은 진정한 ‘기술 중심 국가’로 설 수 있다. 한미 관세 협상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입증했다. 기술이 외교가 되고, 외교가 다시 산업의 성장 동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다. 경주 APEC의 불빛은 꺼지겠지만, 그 빛이 남긴 에너지는 한국 산업을 더 멀리, 더 깊이 이끌어갈 것이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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