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시는 탕정면·배방읍 중심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고 있는 도시다. 이들 동부권과 달리 아산 서부권서도 넓은 구릉지대가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돼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는 곳이 있다. 신창면 남성리(南城里) 일대로 약 2만평에 향후 1만여 세대가 들어설 전망이다. 이미 수천 세대가 완공됐거나 입주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남성리 지역은 도시개발과 함께 꼭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이곳이 한국사에 있어 중요한 고대 유적지라는 사실이다. 그간 시에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아 관심을 못 받았을 뿐이다.
50년 전인 1976년, 남성리에선 중요한 선사유적이 발굴됐다. 한 농가에서 우물을 파다가 고대 석관묘(돌널무덤)를 발견한 것이다.
이 무덤에서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청동기들이 나와 주목을 끌었다. 고대 최고 지배계층 무덤서만 나오는 ‘3종세트’ 유물도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기원 전후 시기, 남성리 일대에 고대국가적 성격의 정치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인다.
이 때문에 2010년 천안·아산 역사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아산 남성리 유적을 크게 다른 적이 있다. 정확한 용도를 몰라 ‘방패형 동기(銅器)’라고 이름 붙인 유물에 특히 주목했다.
이 유물은 창이나 화살을 막는 데 사용하는 방패처럼 생겨 이처럼 이름이 붙었다. 실제 방패처럼 크지는 않다. 길이 17.6㎝, 너비 19.5㎝로 손바닥만 하다. 그 모양이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쫙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위쪽에는 구멍 세 개가 뚫려 있다. 여기에 끈을 묶어 사람 목이나 옷에다 걸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두 팔’의 끄트머리에 방울이 붙어 있다.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고 속은 비었다.
또 하나 특이한 청동기가 나왔다. 이것도 모양이 검을 잡는 부분 같아 ‘검파(劍把)형 동기’라고 명명했다. 대나무 두 마디를 쪼개 놓은 모양새인데 3개가 출토됐다. 길이는 약 25㎝, 너비는 18~19㎝. 이 중 사슴이 조그많게 조각돼 있는 게 있어 이채롭다. 사슴 몸체는 점선으로 표시했고 두개의 뿔이 길게, 꼬리는 짧게 표현돼 있다. 이들 청동기를 고고학계는 제정일치시대 샤먼(제사장)의 장식품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 방패형·검파형동기와 거의 비슷한 청동기가 2년 후 예산 동서리서도 발견됐다. 신창 남성리와는 약 25km 떨어진 곳이다. 한반도에서 충남의 신창과 예산에서만 이런 청동기가 나왔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또 남성리 유적에서는 세형동검(劍) 9점과 다뉴조문경(鏡) 및 곡옥(玉)이 출토됐다. 특히 곡옥은 영롱한 빛과 세공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들 3종 유물, 칼·거울·옥은 고대 최상위 지배자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산 남성리 유적지는 보존가치가 뚜렷하고 주민에게 널리 알려야 할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몇 해 전 국가유산청에서 고대역사문화권 사업 후보지를 공모했을 때, 곡교천 주변 고대유적지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삼성디스플레이가 들어선 탕정 명암리 및 신창 남성리에 전시관은 커녕 유적지를 알리는 표석조차 없어 관계자들이 개탄한 적이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자랑스런 남성리 유적에 관심을 갖자. 성재경 신창면 주민자치워원장은 “2년여 전 아산시와 유적지 알림시설 설치 등을 논의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말했다. 욕심을 내자면 유적의 중요성을 들어 국가유산청에 주변지역 재조사를 요청했으면 한다. 50년 전에는 발굴이 달랑 석관묘 1기 그쳐 전체적인 유적 성격을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향후 ‘남성리유적전시관’을 지으려면 선결해야 할 과제다. / 천안·아산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