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9)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9)

밀레가 남긴 걸작 <키질하는 사람>

기사승인 2025-07-28 09:00:04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59,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밀레의 붓끝, 대지 위에 새긴 신념

그림 속 풍경이 마치 기도로 물든 순간처럼 고요하게 다가온다. 해질녘의 붉은 빛이 대지를 감싸며 농부는 하루를 마무리한다. 부부는 삶과 종교가 맞닿는 곳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오늘의 수확은 내일의 희망이 되고, 겸손한 삶은 신앙과 함께 숨 쉰다. 오르세에 자리한 이 작품처럼, 삶의 가치는 주어진 것에 충실할 때 피어난다.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할머니가 밭에서 삼종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기억하며 <만종>을 그렸다. 보스턴 미술관의 <감자 심는 사람>의 후속작처럼 보인다.

지평선에 아스라히 종탑이 보이는 교회는 나중에 그려 넣었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감자 바구니가 아기의 관처럼 생겼다고 영감을 받은 작품을 10여점을 남겼다. 달리가 책까지 펴내며 편집증 적인 주장을 반복하자 미술관에서는 엑스레이 검사를 하였다. 감자바구니가 처음에는 관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내가 처음 본 서양화는 밀레의 <만종>이다. 물론 그림 엽서나 사진을 액자에 넣어 할아버지댁 마루에 걸려 있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붉은 노을에 잠긴 초라한 부부의 경건한 분위기가 쉽사리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늘 바라보는 풍경이 화가의 시선을 통해 완성된 순간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기엔 너무 어렸지만 그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작가이자 아트 컬렉터인 토마스 골드 애플턴(Thomas Gold Appleton)이 주문했지만, 결국 구매하지 않았고 이후 여러 차례 거래되며 아메리카 협회로 팔리며 가격이 급등했다. 이 작품은 ‘새 시대의 새로운 종교화’라는 극찬을 받으며 프랑스에서 ‘만종 구하기’ 모금 운동이 시작된다.

1890년에는 프랑스 백화점 소유주이자 루브르 박물관 위원이었던 알프레드 쇼사르(Alfred Chauchard)가 75만 프랑(약 100억 원)에 구매했고, 1910년 프랑스 정부에 유증하면서 오르세 미술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기, 1857, 캔버스에 유채, 83.5X111cm, 오르세 미술관

이삭을 줍는 여인들 뒤로 수확한 짚단을 쌓아놓은 노적가리와 저택 그리고 말을 탄 농장관리인이 있다. 프랑스는 농업 국가이고 가톨릭 국가로 이삭을 주어가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하루 종일 모아도 한끼나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지. 세 여인은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머리수건과 자세로 변화를 주었다. 햇빛에 그을려 까맣게 탄 얼굴과 손, 파란 수건을 쓴 여인은 허리가 아픈지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있다.

밀레는 자신의 그림 주제 때문에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았다. 그는 현실을 묘사했지만, 세상은 그것을 체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밀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대표작인 <이삭줍기>에는 계급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풍경은 사색의 대상일 수 있지만, 인물은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기에 화가의 철학과 태도가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보이듯, 노동자와 농민이 사회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자,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겪은 기존 지배계층은 큰 불안을 느꼈다. 현실 정치에서 농민들이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 나아가 황제로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왕당파와 공화파에게는 충격이었고, 이는 밀레의 그림 속에서도 반영되었다.

더욱이 밀레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이제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농민이라는 사실은, 예술의 주도권마저 상류층에서 밀려났다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초상화는 오랫동안 고귀한 인물의 몫이었으나, 그 틀이 깨진 지금, 기득권층은 그림 속에서도 자신들의 몰락을 마주한 셈이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농업에 기반한 국가였지만, 산업혁명을 계기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은 단순한 생산지에서, 점차 문명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머무는 낙후된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농경사회에서 농촌은 삶의 중심이자 공동체의 터전이었지만, 산업사회에서는 도시 중심의 시선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진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떠올리는 농촌의 모습 역시 이 시기 도시인들의 시선 속에서 형성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밀레는 바르비종에서 프랑스의 보물을 넘어 인류의 유산을 완성했다. 밀레는 농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화가였다. 그 댓가로 경제적인 궁핍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이삭줍기>를 그리던 무렵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이달을 어떻게 버틸까? 애들이라도 먹여야 할 텐데! 가슴은 시커멓게 타버려 숯덩이 같아. 조만간 먹구름이 덮칠 테지만 어쩌겠어. 갈 데까지 가봐야지. 그림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도 끊이지 않고. 아주 지쳤어. 이달 말까지 살아 있기나 할까?"

반 고흐는 밀레의 전기를 읽으며 “아이들에게 먹일 스프가 필요했다”는 개인적인 고충에 더 공감하고 존경심을 갖게 된다. 밀레의 편지에는 늘 그가 봉착한 여러 문제가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꼭 해야 한다.”는 말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냈다. 

​장 프랑수아 밀레, 키질하는 사람, 1848년경, 나무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시대를 넘어 울리는 노동의 찬가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은 노동의 숭고함과 현실의 고단함을 동시에 담아낸 걸작이다.

밀레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건 ‘정적’이다. 배경은 늘 뿌옇고 어디인지 분간조차 안 가지만, 이상하게도 인물은 또렷하다. 그 뚜렷함은 어떤 생생함이라기 보다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묘한 무게감을 주는 쪽이다.

알고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밀레는 야외에서 스케치하는 대신, 작업실 안에서 상상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 직접 보고 그리지 않았는데도 인물 하나하나가 이토록 살아있는 건, 그가 얼마나 농민들의 삶을 깊이 관찰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다만 그 생명력은 ‘움직임’이 아니라 ‘존재감’에서 온다. 그는 인물을 세부 묘사 없이 덩어리처럼 크게 표현하고, 전면에 단순하게 배치한다. 그러니 딱 한 명만 서 있어도 장엄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거다.

1848년, 유럽이 혁명으로 뒤흔들릴 때 밀레는 <키질하는 농부>와 <바빌론에서 포로가 된 유대인>을 살롱에 출품한다. 전시회조차 혼란 속에서 겨우 열렸지만, 그 속에서 밀레의 작품은 확실히 시선을 끌었다. 관람객들은 ‘자유 전시’라는 말에 들떴고, 기존의 심사 기준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화풍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본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는 말한다. “깔끔한 부르주아가 보면 불쾌해 할 법한 그림이다. 세련된 기름칠도, 빛나는 광택도 없고, 마치 흙으로 색을 바른 듯한 거친 질감만이 남았다.”

그 말은 비난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 거친 질감과 솔직한 이야말로 밀레 그림의 진짜 매력이다. 그는 농민의 삶을 포장 없이 진지하게 바라봤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그의 그림 앞에서 멈춰 서게 되는 이유 아닐까?

<키질하는 사람> 부분

그의 손끝에서 흩날리는 황금빛 검불은 마치 빛을 머금은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300년 전에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5/90~1576)가 그린 <다나에>의 황금비와 밀레의 황금빛 검불에서 시대와 주제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티치아노와 아틀리에, 다나에(Danae), 1554년 이후,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

<다나에>는 티치아노의 대표작으로 6개의 버전으로 그려졌다. 이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와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Boccaccico)에 의해 언급된 다나에 공주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다나에의 아들이 외할아버지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스우스(Acrisius)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에 왕은 다나에를 청동탑에 가둔다. 그러나 바람둥이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해 다나에를 유혹한다는 전설이다. 티치아노는 제우스가 뿌리는 황금비를 묘사하는데 있어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여 클림트를 비롯한 후대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을 통해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들의 노동이 단순한 생존의 몸부림이 아니라 숭고한 가치와 존엄을 지닌 것임을 강조했다. 1848년 2월 혁명의 주축이었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그림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밀레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시대의 흐름과 인간의 존엄을 담아낸 예술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농민들의 모습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아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준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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