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6)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6)

에릭 사티의 뮤즈가 된 수잔 발라동 (2)

기사승인 2025-07-07 09:19:39
라몬 카사스, 에릭 사티(보헤미안, 몽마르트의 시인), 1891,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에서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초상화가 전시된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전신 초상화만 눈에 들어왔다. 발길은 저절로 초상화 앞에 멈춰졌고, 실물 크기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큐레이터는 이 방에 수잔 발라동의 삶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퓌뷔 드 샤반의 <예술과 뮤즈의 사랑을 받는 성스러운 숲>을 비롯한 샤반의 다른 작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 같은 방이나 나란히 전시된 작품들의 연결 고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웅장한 귀족 초상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안의 인물은 허술하고 기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예술가였다. 실크 햇(silk hat)와 벨벳 양복—겉으로는 우아하게 보이지만, 흐트러진 차림새는 그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검은 양복 12벌을 맞춰놓고 단 한 벌 만 입으며, 낡으면 새것으로 갈아입는 습관은 그의 독특한 생활방식의 질서를 드러낸다. 검은 우산 100개를 두고도 더러워질까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기이하다.

그리고 흰색 음식만을 먹는 그의 식습관—치즈, 계란, 쌀, 순무, 삶은 닭고기—이는 단순한 취향을 넘어, 마치 자신만의 음악처럼 조율된 삶의 방식이었다. 사티의 세계는 항상 독창적이었고,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달빛이 스며든 파리의 밤, 카바레 '물랭 드 갈라트'"의 흐릿한 풍차 너머로 에릭 사티의 음악이 흘렀다. 화가들은 그 공간을 화폭에 담았고, 그는 피아노 앞에서 자신의 삶을 선율로 새겼다.

'검은 고양이' 카페에서 피아노를 두드리며 생계를 꾸리던 사티는 장 콕토,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들과 나눈 이야기와 웃음 속엔 가난과 기행이 섞여 있었고, 그의 얼굴은 고독이 새겨진 흔적으로 공허하다. 그는 평생 보헤미안으로 살았고, 세상과는 조금 다른 리듬 속에서 존재했다. 

<에릭 사티> 부분

스페인의 화가 라몬 카사스(Ramon Casas, 1866~1932)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예술과 자유가 넘실대는 몽마르트의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미 이곳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있던 툴루즈-로트렉을 만났고, 로트렉은 카사스에게 파리의 생동감 넘치는 현대적 삶을 화폭에 담으라고 조언했다.

카사스는 그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일상과 인물을 그림 속에 포착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사실성과 세련된 구성으로 주목받았고, 결국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스페인 위원회는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 두 점을 선정했다. 1891년작 <에릭 사티>와 1895년작으로 여동생을 그린 <엘리사의 초상화>—이 두 작품은 그의 예술적 성취를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남았다.

어둠이 내린 몽마르트의 거리, 카사스의 붓끝에서 피어나는 시대의 풍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생한 감각을 선사한다.

1888년 군대에 적응하지 못한, 에릭 사티는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는 옷깃을 풀어 헤쳐 일부러 기관지염에 걸려 병실에 누워 있었고, 그곳에서 플로베르의 '살람보'를 읽으며 다른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조용한 선율이 피어났다. 절제된 리듬과 서정적인 흐름이 반복되는 곡, '세 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였다.

낭만주의 음악의 전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티는 사람들의 귀를 강하게 사로잡는 음악이 아니라, 오히려 배경처럼 스며드는 가구 같은 음악을 원했다. 그의 곡은 정적인 멜로디로 공간을 채웠고, 사람들이 특별히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런 그의 음악은 제목은 낯설지만 익숙한 듯 다가왔고, 광고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현대의 감각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는 늘 자신의 음악이 일상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짐노페디'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숨쉬며 우리 곁에 머물렀다.  

​피에르 위그, 오프스프링(Offspring), 2018, 라이트 박스, 빛, 안개, 사운드 시스템, 향, 피노 컬렉션

리움에서 열린 피에로 위그 전 <오프스프링스>는 감각의 경계를 허무는 독창적인 경험이었다. 스모그가 자욱한 공간 속에서 '짐노페디 2번, 3번'이 클로드 드뷔시의 편곡을 거쳐 연주되고, 그 자체로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향과 빛, 그리고 흐릿하게 번지는 스모그—이 모든 요소가 음악과 결합되며 작품 속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사티의 절제된 선율이 퍼지는 순간, 관객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런 경험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가장 순수한 마법이다. 

수잔 발라동, 나부들(Nudes), 1919, 상파울루 미술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은 거침없는 붓질로 여성의 삶과 존재를 화폭에 새겼다. 그녀의 누드화는 기존의 이상화 된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시각으로 여성의 몸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40대 모델의 늘어진 뱃살조차 가감 없이 그려냈고, 자화상 속에서는 강한 자의식이 드러났다.

노동계급 여성들의 몸짓과 일상을 포착하며, 순간의 감정과 움직임을 강렬한 색채와 힘 있는 선으로 담아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정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이 스며 있다. 발라동의 붓끝은 단순한 묘사가 아닌, 여성의 현실과 자아를 대담하게 드러내는 선언이었다. ​ 

수잔 발라동 푸른 방, 1924, 캔버스에 유채, 퐁피두 센터

발라동의 <푸른 방>은 단순히 여인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 기존의 미술적 규범을 흔들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혁신적인 작품이다. 그녀의 뚜렷한 선과 대담한 색채는 후기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사랑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냈다.

티치아노나 앵그르가 그린 누드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으며, 마네나 마티스의 누드에서 발전하여, 발라동은 여성을 단순한 관음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그렸다. 책을 읽고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여인의 모습은 매춘부들을 상징하는 유혹적이거나 순종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현대적 여성의 초상이었다.

그녀의 붓끝에서 탄생한 여성들은 누군가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인간 그 자체였다. 발라동의 강렬한 조형감과 감각적인 색채는 여성의 자아를 더욱 강조하며, 그녀의 그림 속 인물들은 당당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수잔 발라동, 아담과 이브, 1909, 캔버스에 유채, 162x131cm, 퐁피두 센터

벨 에포크 시대, 프랑스는 번영과 예술적 혁신으로 빛났다. 그 속에서 수잔 발라동은 자신의 삶과 사랑을 예술 속에 녹여냈다.

그녀의 작품 <아담과 이브>는 남성이 여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그려진 첫 사례로, 기존의 누드화 개념을 뒤집는 대담한 시도였다. 모델이었던 안드레 우티는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의 친구였고, 이후 발라동과 우티는 연인이 되어 70대까지 사랑을 이어간다. 그녀는 주식중개인 마우시스와 이혼한 후 우티와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 후에도 함께 묻혀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들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통해 다시 삶을 찾게 한 것도 그녀의 강인한 의지였다. 그들은 함께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며 예술의 길을 걸었고, 몽마르트 언덕의 풍경 속에서 발라동의 미술관과 위트릴로의 작품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녀의 예술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삶과 사랑, 그리고 여성의 독립을 담아낸 강렬한 선언이었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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