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마르트에서 카페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은 르누아르, 샤반, 로트렉, 드가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로 자신도 화가가 된 여성이다. 발라동은 당시 인상주의 여성화가인 메리 카셋, 베르트 모리조 그리고 에바 곤잘레스 등 상류층 여성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걷는다.
발라동의 그림은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밑바닥 인생을 맨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여인의 강인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솔직함이 있다. 아들의 친구와 결혼해 살았던 위선적이지 않은 그녀의 삶처럼 그림도 역시 그랬다. 20세기 후반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수잔 발라동의 작품은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기존 남성 화가들의 시각이 아닌 여성의 자유와 인물의 독립 그리고 현실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이 사랑했던 수잔 발라동이 모델이다. 프랑스 남부 알비 출신의 로트렉을 빈센트 반 고흐는 코르몽 화실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이 작품은 테오의 파리 아파트에 걸려 있었다. 구필 화랑의 아트 딜러였던 테오는 아마도 빈센트의 조언으로 이 작품을 샀을 것이다.
푸드레 드 리즈(Poudre de Riz)라는 제목은 당대 여성들의 미용 습관과 연결되어 있다. 당시에는 밝은 화장이 유행했고, 분가루를 사용해 피부를 창백하게 보이도록 했다. 로트렉이 표현한 색감과 분위기는 확실히 나란히 걸린 반 고흐의 <세가토리>와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후기 작품의 특징인 석판화를 이용한 대담한 구도의 강렬한 포스터와 달리 파스텔로 스케치한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56살의 퓌뷔 드 샤반(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은 1880년에 16살인 발라동을 집으로 데려왔다. 갈색 머리에 크고 파란 눈, 약간 굽은 코를 하고 154cm의 작은 키였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였다. 발라동은 모델과 하녀 그리고 정부가 되었다.
샤반은 발라동의 이미지에서 신화 인물 12명을 그리기도 하였다. <예술과 뮤즈의 사랑을 받는 성스러운 숲>에 묘사된 많은 여인들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때론 발라동은 남성 캐릭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오른편 월계수 잎을 따는 소년의 팔은 발라동의 팔을 그린 것이다.
당대 예술가들의 세계에서 모델들은 단순한 포즈 제공자가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핵심이었다. 특히 샤반같은 화가는 모델의 신체를 다양한 캐릭터로 변형해 작품에 반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했다.
수잔 발라동은 이러한 예술적 변형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모델이었고, 그녀의 신체적 특징은 여러 작품에서 신화적 인물로 재창조되었다. 그녀의 작은 체구와 강렬한 시선은 당시 누드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아함과 차별화되는 요소였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마침 샤반의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어느 시대인지, 어떤 장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화 된 평화로운 풍경이다.
캔버스는 현실적이지 않은 신화 속의 인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샤반은 고대 그리스의 예술에 대한 시적인 개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에 등장하는 여신을 초대하였다. 상반신 누드로 가운데 자리한 인물들은 건축, 회화, 조각이라는 세 가지 조형예술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들은 신화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뮤즈에 둘러 쌓여 있다.
샤반의 차분한 파스텔톤 색채는 정적이며 고요한 뉘앙스로 로마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샤반은 1884년 살롱에 이 그림을 전시하였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벽화가였으며, 이 캔버스는 리옹의 보 미술관 계단 벽화를 위해 만든 벽화의 작은 버전이다. 이 작품은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조르주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의 크기를 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샤반은 수잔 발라동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색을 혼합하고, 붓을 사용하고, 명암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샤반의 테크닉을 모방함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완벽한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다.

1883년 18살의 발라동은 가로 32cm, 세로 45cm 크기의 종이에 파스텔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그녀는 작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샤반은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와 함께 이 재능 있는 제자가 첫 누드화 전시를 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발라동은 파리 미술학교에 입학한 첫 번째 여학생이 되었다.

1865년 미혼모인 세탁부의 딸로 태어나 파리로 온 뒤 가정부, 행상, 공장 일용직을 전전하였다. 그리고 15살 때 서커스 곡예사로 일하다 말에서 떨어져 몽마르트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라동의 이지적인 외모는 곧 화가들의 눈에 띄어 인기 있는 모델이 되었다.
르누아르의 ‘춤 3부작’으로 일컫는 <도시의 춤>, <부지발의 춤>에서는 젊고 화려한 모습이 발라동의 처지를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후 발라동은 사생아를 출산하였다. 르누아르의 모델을 서고 난 뒤였기에 그가 아버지가 아닐까 라는 소문도 있었고, 퓌비 드 샤반이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난무했다. 실제로 르누아르는 자신의 아내가 된 모델 샤린 알리고를 그린 <시골의 춤>보다 발라동을 더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렸다.
이후 발라동은 로트렉의 모델로 그에게 그림을 배웠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뜨거웠던 사랑은 결혼을 거부하는1888년 발라동의 자살 시도와 더불어 2년만에 끝이 난다. 그리고 로트렉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이제 그는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그림에 집착했다.
그는 한때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누리는 기쁨보다 더 좋아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짧지만 강렬한 사랑과 이별은 각자의 작품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특히 로트렉에게는 예술적 집착을 더욱 강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890년대 발라동의 그림을 처음 구입한 이는 드가였으며, 평생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주었다. 1894년에는 프랑스 국립살롱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여성 화가로 그녀가 얼마나 대담하고 도전적으로 삶을 개척해 왔는지 말해준다. 수잔 발라동은 19세기 말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황량한 아름다움이 남는다. 사티는 발라동이 로트렉과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발라동과 사티의 6개월 간의 짧았던 사랑은 사티의 음악과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사티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음표로 녹여냈다. 27년간 다른 여인을 사랑하지 않고 <난 너를 원해 Je Te veux>를 통해 가슴 깊이 간직한 사랑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가 떠난 뒤에 아무도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던 초라한 그의 집에 고요만이 남았다. 검은 양복 12벌, 검은 모자, 100개의 검은 우산만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흔적이었다. 그리고 발라동이 그려준 초상화 한 점만 그의 사랑을 기억해주고 있었다. 이제 사람은 가고 음악과 그림만이 남았다. (2편으로 계속)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