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광복절이 다가오면 ‘잘 알려진 영웅’의 이름이 매스컴을 도배한다. 김구, 안중근, 유관순 등 숭고한 희생을 남긴 이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지만, 그 뒤에서 묵묵히 저항의 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점차 잊히고 있다. 쿠키뉴스는 이번 광복 80년 기획을 통해 잊힌 이름들을 다시 소환하고, 우리의 ‘기억 범위’를 넓혀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

이 무렵이면 각종 미디어에는 어김없이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이 비슷한 레퍼토리로 반복된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결코 ‘잘 알려진 영웅’ 몇몇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문화와 스포츠 등 비무장 영역에서 저항 흔적을 남긴 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제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문화 영역에서는 윤동주·이육사 시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문장으로 한국인을 사로잡은 작품 ‘서시’를 남겼다. 윤동주만의 순수한 언어 세계를 바탕으로, 고뇌의 흔적이 깃든 도덕적 성찰과 민족의식을 닮은 시인의 시는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걸린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 일부다. ‘광복절’에 걸맞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소위 ‘힐링’ 문화를 더 좋아하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당시 교보생명 관계자는 윤동주 시인의 여러 가지 시 중 ‘자화상’을 전시한 배경에 대해 “고단한 현실에 처해 있더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촉발된 이른바 ‘텍스트힙’ 열풍 이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듯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경우, 그의 작품이나 문학 세계가 조명되기 보다는 ‘굿즈’ 형태로 재탄생했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이렇다 할 행사나 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 서점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8월의 굿즈, 윤동주 여권케이스·에코백’ 등을 팔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현상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책을 판매하는 부스가 인산인해를 이루거나 품절이 됐다는 얘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인기 굿즈’ 앞에는 언제나 많은 인파가 몰렸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텍스트힙이 아니라 ‘굿즈힙’ 아니냐는 자조적인 얘기도 나오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육사 시인은 독립운동과 문학을 동시에 껴안은 삶을 살았다.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렀고, 고초를 겪으면서 써내려간 시 ‘광야’, ‘청포도’에는 민족 해방 열망이 절절히 담겼다. 강건하고 확신에 찬 어조가 돋보이는 이육사 시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저항시’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스포츠 영역에서는 손기정을 빼놓을 수 없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29분19초,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목에 건 24세 동양인 청년 손기정. 그러나 광복 80년을 맞은 올해, 손기정의 이야기는 단순한 스포츠 영웅담에서 그치지 않는다. 손기정 스토리는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의지, 불굴의 투지로 조국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달린 한 청년의 초상이다. 베를린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그의 발걸음은, 우리에게 ‘가슴 속에 어떤 깃발을 품고 달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골프계에선 지난해부터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와 대한골프협회(KGA)가 힘을 합쳐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故 연덕춘 고문(1916~2004년)의 이름을 되찾는 과업을 완수했다. 연덕춘 고문은 1941년 ‘일본오픈 골프선수권대회(이하 일본오픈)’에서 우승했다. 당시 우승은 한국인 최초 ‘일본오픈’ 우승이자 한국 선수가 해외 무대에서 거둔 첫 승이었다.
이는 1936년 손기정의 금메달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인 위상을 크게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꼽힌다. 하지만 일본 골프사에서 ‘연덕춘’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1941년 ‘일본오픈’ 우승자는 일본인 ‘노부하라 도쿠하루(延原 德春)’로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달라진다. 올해 일본골프협회(JGA)의 전격적인 협력으로 84년만에 ‘노부하라 도쿠하루’가 ‘연덕춘’으로 돌아왔다.
손기정 선생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손기정은 1950년대까지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민족이 힘들었던 시기에 손기정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무총장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기정에 대한 평가가 퇴색되고 있다. 손기정의 가치는 없어지고 그냥 베를린에서 잘 뛴 사람, 우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너무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다. 광복 80년을 맞아 할아버지가 남긴 뜻을 되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강형구 손기정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역시 “손기정은 나라를 잃었을 때, 국가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준 인물”이라면서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라를 잃은 것보다는 훨씬 행복하다. 손기정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다시 봐야 한다. 광복 80년에도 손기정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힘줘 말했다.
이들이 서서히 잊히게 되면서 우리는 ‘광복을 이끈 인물’을 잘 알려진 영웅, 주로 전쟁터에서 피를 흘린 인물 몇 명의 얼굴로만 기억하게 됐다. 이번 기획은 틀을 깨는 첫걸음이다. 문화와 스포츠 영역을 비롯한 다채로운 전장에서 싸웠던 이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면서, 광복절이 ‘수많은 이들의 날’이 될 수 있도록 기억을 확장해 나가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이들을 더욱 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2편(일장기가 부끄러웠던 24세 마라톤 영웅, ‘조선인’ 손기정 [광복 80년 기획②])에서는 손기정 스토리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