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국학진흥원이 공개한 이만도 '향산집' 검열본이 일제의 ‘출판법’ 아래 독립운동가 기록이 삭제·압류로 훼손된 실상을 드러내, 식민지 검열의 기억 말살을 입증했다.
13일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일제가 ‘출판법’(1909)으로 조선의 출판물을 통제하던 시기, 독립운동가 향산 이만도(1842~1910)의 문집 향산집은 조선총독부 검열에 걸려 대거 삭제·압류를 당했고, 해방(1945) 이후인 1948년에야 간행을 마칠 수 있었다.
조선의 지식과 기억을 지우려 한 검열은 치밀했다. 일본은 1909년 2월 출판법을 적용해 조선에서 간행되는 책 전체를 사전 심사 대상으로 묶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향산집 검열본(1931년 총독부 제출 후 반환)은 이런 억압의 실상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문제로 지목된 문구에는 붉은색 ‘削除(삭제)’ 도장이 찍혔고, 민감 대목은 붉은 원·밑줄로 표시됐다.
특히 ‘금상(今上)·성상(聖上)’ 등 조선 국왕 지칭과 임진왜란 관련 기술에 집중적으로 제동을 걸어, 조선의 역사 기억 자체를 통제하려 했던 의도를 드러낸다.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1910년 국권 피탈 소식을 듣고 단식 끝에 순국한 인물이다.
그의 후손과 제자들은 사후 문집 간행을 추진했지만, 검열을 거치지 않고는 인쇄를 할 수 없었다.
현재 확인되는 검열본은 전체 14책 중 3책(본집 2·별집 1, 표지서명 ‘직재집’)이 한국국학진흥원에 남아 있다.
총독부는 향산집의 출판을 불허·차압하면서 “이만도는 조약 체결과 한일병합에 격렬히 반대한 자이며, 내용이 치안방해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댔다.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조약 강요, 이완용 등 ‘을사오적’, 이에 분개해 순절한 민영환 등을 다룬 서술이 ‘치안방해’의 근거로 적시됐다.
그 결과 14책 가운데 상당수가 간행되지 못했고, 일부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검열의 후과는 길었다. 향산집은 해방 후인 19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간행을 마무리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향산집 간행 과정은 폭력적 출판검열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분투를 보여준다”며 “유사 사례 발굴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