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손기정의 삶을 느껴라” [광복 80년 기획③]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손기정의 삶을 느껴라” [광복 80년 기획③]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견제·열악한 환경 이겨내고 金
“국립중앙박물관 기념전 통해 ‘손기정 정신’ 돌아봤으면”

기사승인 2025-08-14 06:00:09
매년 광복절이 다가오면 ‘잘 알려진 영웅’의 이름이 매스컴을 도배한다. 김구, 안중근, 유관순 등 숭고한 희생을 남긴 이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지만, 그 뒤에서 묵묵히 저항의 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점차 잊히고 있다. 쿠키뉴스는 이번 광복 80년 기획을 통해 잊힌 이름들을 다시 소환하고, 우리의 ‘기억 범위’를 넓혀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손기정 선생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이 지난달 15일 서울 중구 손기정기념관에서 할아버지 사진 앞에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유희태 기자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을 닮아갔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는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없는 노력과 도전으로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손기정을 배우기보다 그 삶을 느끼며 손기정과 같은 그림을 그려갔으면 해요.”

손기정 선생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지난달 쿠키뉴스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손기정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가족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일장기를 가리는 등 조선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대한독립을 염원했던 손기정은 해방 이후에도 체육계에 크게 공헌했다. 감독이 된 그는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과 우승을 합작했다. 3년 뒤 같은 대회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1~3위 석권을 이끌었다. 보스턴의 기적을 만든 손기정은 경기 도중 물 마시는 법, 컨디션 조절 방식 등 한발 앞서 간 지도로 세계 마라톤계를 뒤흔들었다. 

이 사무총장은 “해방 정국에서 우리 민족에 희망을 안겨준 대표적인 사건”이라며 “보스턴 마라톤은 1947년 ‘팀 손기정’의 참가 덕에 국제 마라톤으로 발전했다. 당시 한국은 미군정 체제로, 나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손기정이 보스턴 마라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출전도 힘들었다”고 평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민족 자긍심과 광복의 의미를 드러낸 인물을 찾았고, 그 주인공으로 ‘민족의 영웅’ 손기정을 선정했다. 지난달 25일 개막한 손기정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는 오는 12월28일까지 이어진다. 이 사무총장은 “손기정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진짜 손기정 이야기는 다들 모르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손기정 정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받은 황금 열쇠와 배지. 유희태 기자

“기억하게 해달라”는 할아버지 유언


이 사무총장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저를 따로 불렀다. 그때 ‘나를 기억하게 해달라’고 말씀하시더라. 거기서 재단이 출발했다”며 “처음에는 ‘3년도 못 버틸 것’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어느덧 20주년까지 끌고 왔다. 손기정 이야기가 잘 안 되는 건, 오히려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 사무총장은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더듬으며 “제 기억 속 할아버지는 너무 좋은 분이다. 같은 방을 쓸 정도로 저와 궁합이 잘 맞았다”고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한 번은 할아버지께 ‘야구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장비를 다 사주셨다. 야구 장비 보급이 쉽지 않던 시절인데, 글러브 9개와 배트, 야구공이 다 준비됐다.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계속 지원해 줬다. 등산을 매번 같이 다녔고, 캠핑도 했다”며 “저한테는 큰 버팀목이었다. 때로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또 나이가 들면서는 동생 같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오히려 제 자식 같은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다. 할아버지를 통해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했다”고 회상했다.

손기정 선생이 생전에 가장 강조한 덕목은 ‘인내’였다. 이 사무총장은 “할아버지는 생전 화투를 한 번도 치지 않으셨다. 이유를 여쭤보니 ‘승부가 너무 빨리 나는 건 안 한다’고 답하셨다”며 “지도자 시절에도 선수들이 노름을 하면 엄하게 꾸짖으셨다. 포기가 빨라지게 되면 마라톤을 못하지 않나. 할아버지는 그 인내심을 가지고 힘든 순간을 이겨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두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전시관에 설치된 미디어월. 유희태 기자

손기정의 인내와 의지를 기억하며


손기정은 가난한 환경에서도 꿈을 펼쳐나갔다.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마라톤을 했다. 학업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달리기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갔다. 마라톤 코스를 몰라 2등을 한 일화도 있을 만큼 열악한 조건 속에서 달렸다.

20살이 되던 1932년, 힘겹게 양정고보(현 양정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손기정은 동기보다 6~7살 많았던 늦깎이 학생이었다. 그는 당시 최고였던 양정고보에서도 홀로 보강 운동을 하며 ‘어떻게 하면 더 빨라질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손기정은 이런 어려운 환경 속 일본의 견제까지 받았지만 끝내 이겨냈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영광의, 그리고 눈물의 금메달 뒤편에는 온갖 어려움을 견뎌낸 손기정의 인내와 의지가 있었다. 이 사무총장은 “기념관을 통해 ‘나도 손기정처럼’이라는 생각을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김영건 기자
dudrjs@kukinews.com
김영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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