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문화스포츠부장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인간인 이세돌 9단이 최근 예능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바둑 썰’을 풀고 있다. 이에 침체돼 있던 바둑계에도 돌연 활기가 돈다. 장강명 작가가 지난 6월26일 출간한 ‘먼저 온 미래(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가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면서 ‘구글 챌린지 매치(이세돌vs알파고)’가 다시 화제가 됐다. 이로 인해 당시 알파고를 목격한 프로기사 등 바둑계 종사자들이 다시 조명을 받는 분위기다.
장 작가는 ‘먼저 온 미래’를 통해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AI를 먼저 경험했다는 측면에서 바둑계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지만 ‘알파고 특수’를 누리기에는 기반이 약했다.
오히려 바둑계는 하향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내 최대 바둑 기전인 한국바둑리그를 필두로 여자바둑리그, 시니어바둑리그로 이어지는 3대 리그에 참여하는 지자체 팀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점이 그 방증이다. 8개 팀이 경합하는 한국바둑리그를 보면 합천, 영암, 전주 등 3개 팀이 지자체 후원으로 출범한 이른바 ‘세금으로 참가하는’ 팀이다. 바둑리그 출전 팀은 참가비 3억원을 한국기원에 내고 있다.
여자바둑리그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9개 팀이 출전한 이번 시즌에 지자체 예산을 안고 한국기원에 참가비를 낸 팀은 7개(부안·삼척·평택·철원·보령·영천·여수)에 달했다. 이쯤 되면 K리그에서 흔히 쓰이는 ‘세금 리그’라는 표현이 붙어도 이상할 게 없다.
나라살림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2025 K리그에 지자체 예산 1216억원이 투입됐다. K리그 1부터 살피면 수원FC가 161억5700만원을 지자체로부터 받은 데 이어 강원FC 120억원, 광주FC 110억6900만원, 대구FC 98억원, FC안양 70억원 등 5개 팀이 지자체 예산으로 팀을 운영하고 있다. K리그 2는 인천유나이티드FC와 경남FC 100억원을 시작으로 김포FC 89억9800만원, 천안시티FC 80억원, 충남아산FC 70억원, 성남FC 60억원 등 무려 9개 팀이 세금을 통해 운영한다.
문제는 여자바둑리그에 5년간 출전할 예정이었던 보령시가 갑자기 불참 의사를 표명하면서 시작됐다. 보령시 ‘연고 선수’로 지명된 여자 바둑 랭킹 2위 최정 9단이 갑자기 ‘번아웃’을 이유로 2024년 5월(당시 랭킹 1위) 팀에서 이탈했다. 보령시는 최 9단을 지역 연고 선수로 계속 보유할 계획이었는데, 팀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는 선수가 빠진다면 여자바둑리그를 계속 운영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김정훈 보령시 의원은 “건강상 이유로 여자바둑리그에서 빠진 최 9단이 왜 다른 대회는 참가하고 있는가”라며 보령시 체육진흥과장에게 질의하기도 했다.
각종 리그를 운영하면서 ‘주관료’ 수입을 올리는 한국기원 입장에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같은 시기에 여자바둑리그에 참가했던 순천시와 서귀포시 등도 팀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순천시 관계자는 쿠키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8500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는데, 큰 비용을 낸 것에 비해 지자체 홍보 효과가 떨어졌다”면서 “감독 1명에 선수 4명인데 지원금이 너무 커서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령시가 여자바둑리그에서 발을 빼려는 이유가 최 9단의 부재 때문이라는 점이 명확해지자, 한국기원과 보령시는 묘수를 뒀다. 리그에 출전하지 않는 최 9단을 서류상 이름은 올릴 수 있는 ‘총감독’ 자리에 세우는 방법을 마련한 것이다. 최 9단의 나이는 만 28세, 여자 바둑 랭킹 또한 1위 김은지 9단에 이은 2위를 마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그라운드를 누벼야 할 손흥민이 주장 완장을 내려놓고 갑자기 구단주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영화 ‘승부’의 실제 주인공인 바둑 황제 조훈현 9단이 고향인 영암의 팀에서 총감독을 맡고 있고, 마찬가지로 바둑 국보로 불리는 이창호 9단은 고향 전주팀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모두 한국바둑리그 소속 지자체 팀인데, 올해 만 72세인 조 9단은 영암에서 열리는 사실상 거의 모든 바둑 행사에 직접 자리해 후배들을 격려하고 관계자들과 만나 우호를 다진다. 이 9단은 한국바둑리그에 20년 가까이 현역으로 뛰었고, 만 50세를 맞은 올해 새롭게 창단한 신생팀 전주의 총감독을 맡았다. 시즌 중에 이 9단은 동갑내기로 절친한 양건 9단이 감독으로 있는 전주팀 검토실에 들러 후배들과 함께 연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최 9단은 지난 2023년 시즌까지 여자바둑리그 보령팀 현역 선수로 뛰었다. 당시 감독은 김미리 5단으로 올해 기준 34세다. 불과 2년 전까지 같은 팀에서 감독과 선수로 만났던 관계가 최 9단의 ‘불참 선언’ 이후 총감독과 감독 구도로 바뀐 것이다. 비인기 스포츠, 그중에서도 특히 지자체 예산으로 운영하는 프로 스포츠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다.
롤모델로 삼아야 하는 대척점에 있는 스포츠가 바로 프로야구다. 전반기에만 700만 관중을 넘긴 프로야구는 지난 8일 역대 최소 경기로 900만 관중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 LG, 한화, 두산, 롯데, KIA, KT, SSG 등 든든한 모기업의 지원이 있지만, 이와 별개로 자체 매출이 늘어나면서 흑자 구조로 전환한 점이 주목받는다. 2023년 3823억원이던 프로야구 구단의 자체 매출은 2024년에 4581억원으로 1년 만에 20% 급성장했다. 굿즈 매출 또한 수직 상승했고, 특히 기아 타이거즈의 경우 연봉이 1억원인 김도영 선수의 유니폼 매출만 110억원에 달했다.
28세 총감독 최 9단은 올해 여자바둑리그 보령팀과 관련된 행사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검토실에 들러 선수단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은 물론 팬들과 만남이나 교류도 아직 없다. 여자바둑리그 불참과 동시에 총감독으로 다시 팀에 묶인 상황이 최 9단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향후 최정 9단의 총감독으로서 활동 계획을 묻는 쿠키뉴스의 질의에 한국기원 관계자는 “하반기에는 해단식, 검토실 내 응원 및 대국 검토, 보령시 바둑 행사 등 외부 공식 활동에도 참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반환점을 돈 여자바둑리그는 오는 9월4일부터 10라운드 경기가 시작된다. 스포츠는 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명확한 진리를 깨닫고, 과거 ‘돈 먹는 하마’로 불린 프로야구가 환골탈태한 것처럼 여타 스포츠도 ‘팬 프렌들리’ 전략을 통해 돌파구를 찾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