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ETF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불과 5년 전 50조원에 머물던 순자산총액(AUM)이 이달 초 250조원을 돌파했다. 상장 ETF 수도 1000개가 넘었다. 코스피 시장에 상장된 종목 수보다 많다. 그러나 질적 성숙은 양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화려한 수치 이면에 ‘복붙(복사 후 붙이기)’이라는 부끄러운 민낯이 있다. ETF는 본래 지수 추종이라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설계 아이디어와 운용 기술을 통해 혁신을 만들어 내는 상품이다. 해외 시장에선 테마·구조·운용기법에서 매번 새로운 접근을 한 상품이 등장한다. 반면 한국 시장에선 이름부터 컨셉, 심지어 종목 구성까지 비슷한 ‘복붙 ETF’가 상당수다.
잘 팔리는 ETF가 등장하면 금세 비슷한 상품이 줄줄이 쏟아진다. 방산ETF가 대표적이다. 한화운용은 △PLUS K방산 ETF를 2023년 1월5일 출시했다. 6개월 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TIGER K방산&우주를 내놨다. 올해 연간 수익률 기준 PLUS K방산이 3위, TIGERK 방산&우주가 4위다. 올 7월엔 업계 1위인 삼성자산운용이 △Kodex K방산TOP10을 출시했다.
복붙 논란의 중심에 선 운용사들은 ‘구성 종목이 다르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선 다르다고 느낄만한 포인트가 없다. 중·소형사가 공들여 특색 있는 상품을 출시해도 대형사가 비슷한 형태로 내놓고 시딩(초기투자자금)으로 제압해 버리면 따라 잡히기 십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ETF 시장에 관심은 있지만 진입할 엄두를 못 내는 운용사들이 많다.
국내 ETF 시장에선 업계 1위인 삼성자산운용(38%)과 2위 미래에셋자산운용(32%)이 70%가량의 점유율을 독식하고 있다. 남은 30% 중 절반을 한국투자신탁운용(8%)과 KB자산운용(7%)이 나눠 갖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26개의 운용사가 15% 시장을 두고 경쟁 중이다.
운용 보수 경쟁도 심화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ETF 시장의 평균 운용보수율은 지난 2011년 평균 31.6베이시스포인트(bp, 1bp=0.01%)로 고점을 찍은 이후 지난해 16.3bp로 절반가량 떨어졌다. 업계에선 ‘사실상 남는 게 없는 장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경쟁이란 시장을 발전시키는 힘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눈앞의 점유율만 좇으며 서로를 베끼는 구조로는 산업 생태계가 자라나기 어렵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쟁 기준을 ‘누가 더 먼저 고유한 컨셉과 전략을 제시하는가’로 바꿔야 한다.
복붙 문제는 제도로 해결할 수 없다. 각 운용사의 상도와 자존심이 견제 장치가 돼야 한다. 곧 ETF 시장은 300조 시대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양이 아닌 질로 평가받는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운용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