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황과 고물가 속에 유통업계가 ‘초저가 경쟁’에 본격 나서고 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이 잇따라 가성비 전략을 강화하면서 가격 인하 경쟁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출혈로 인한 체력 소진 우려와 함께, 가격 정상화와 소비자 부담 완화라는 시각이 엇갈린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의 마케팅 키워드는 ‘초저가’로 굳어지고 있다. 모든 상품을 500원부터 5000원까지 균일가로 판매해 올해 ‘4조 클럽’ 진입을 앞둔 다이소의 성공 사례를 시작으로 유통업계가 가성비 수요를 겨냥해 상품 구성을 재편하는 모습이다.
이마트는 이달 전 품목을 5000원 이하로 구성한 신규 자체 브랜드(PL) ‘오케이 프라이스(5K PRICE)’를 출시했다. 지난해 7월 이마트와 에브리데이 합병 이후 처음 선보이는 통합 PL로, 전국 이마트와 에브리데이 37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된다. 카놀라유(500㎖)·해바라기유(500㎖)를 3480원, 포도씨유(500㎖)·올리브유(250㎖)를 4980원에 내놓는 등 모든 상품 가격대를 880원~4980원으로 책정했다. 이마트는 통합 매입과 글로벌 소싱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편의점들도 가성비 라인업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GS25는 다음 달부터 500여 개 점포에 건강·뷰티 중심의 ‘카테고리 킬러형 전문 매대’를 도입한다. 색조·기초 화장품 가격은 평균 3000원대다. CU는 가격은 그대로 두고 중량을 최대 50%까지 늘린 ‘압도적 플러스 간편식’을 출시했으며, 자체 브랜드(PB) ‘피빅(PBICK)’을 스낵·두유·시리얼바·컵커피 등으로 확대하며 가성비 상품군을 넓히고 있다.
유통업체 한 관계자는 “중간 유통 단계를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별도로 이뤄지던 제품 가공과 패킹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협력업체를 발굴하는 등 효율화에 힘쓰고 있다”며 “본사뿐 아니라 협력 제조사들도 소싱 원가를 낮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유통 과정 전반에서 협력사들의 역량이 함께 모여야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출혈 경쟁 vs 가격 혁신
업계 일각에서는 초저가 경쟁이 오프라인 유통업체의 체력을 빠르게 소진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미 온라인 쇼핑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원가 절감 여력이 한계에 부딪히면 지속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대량 매입이나 직매입 등은 대기업에 유리해, 중소업체가 더 빨리 도태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초저가 상품을 미끼로 삼고 고마진 상품에서 수익을 보전하는 방식 역시 중소업체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 유통업계는 일종의 ‘다이소라이제이션(Daisolization)’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불황이 장기화되고 가처분소득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전자상거래와 플랫폼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다 보니, 오프라인은 초저가 전략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며 “유통 소매업은 그렇지 않으면 버티기 어렵고 특히 중소업체나 제조사들은 연대와 혁신 전략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구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장기화된 불경기와 고물가 속에서 초저가 경쟁이 숨통을 틔워주는 동시에 시장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불필요하게 높았던 유통 마진이나 과도한 광고비가 줄어드는 등 유통 혁신이 이뤄질 수 있고, 불황기에 초저가 상품을 통해 가계 부담이 완화되면 소비 여력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거래가 성사되려면 소비자가 수용할 수 있는 가격이 맞춰져야 한다. 시장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향 조정되는 것은 결국 정상가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비효율을 덜어내는 일종의 ‘가격 혁신’이라고 볼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선진국 성장률 수준인 2%대에 머무는 상황에서 지나친 제품 가격 상승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테무가 한때 ‘테무깡’ 등 초저가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품질 문제가 지속가능성을 약화시킨 반면, 다이소나 국내 유통업체 제품들은 적절한 품질을 갖추며 반복 구매가 이어지고 있다”며 “결국 초저가 경쟁 속에서도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업체들의 과제이며 소비자 측면에서는 가격 정상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