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한 배우와 망한 감독이 만났다. 더 물러설 곳 없는 두 사람은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첫 대표작 ‘공동경비구역 JSA’를 탄생시켰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다. 두 사람은 각자 최고의 위치에 오르고서야 마침내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만나게 됐다. 배우 이병헌과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다.
24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감독님이 바뀌신 건지, 제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련돼진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같은 점은 여전히 열려 계시다는 것”이라며 박찬욱 감독과 재회한 소회를 밝혔다.
‘어쩔수가없다’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만수의 재취업기다. 그리고 이병헌은 만수 역을 맡았다. 만수는 극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핵심인물인데, 이병헌 역시 배역처럼 지금의 ‘어쩔수가없다’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그의 아이디어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감독님과 제가 배틀하듯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었어요. 질보다 양이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얘기할 때마다 적용하시겠다는 거예요. 겁이 나더라고요. 저한테 책임 전가하시려고 그러나 싶고요(웃음). 후반부에는 말을 아꼈어요. 오히려 부담스러워진 부분이 살짝 생긴 거죠.”
하지만 이병헌의 의견이 반영된 대목을 들어보니 이같은 너스레는 겸손이었다. 이견이 없는 명장면 ‘고추잠자리’ 시퀀스에서 만수, 범모(이성민), 아라(염혜란)는 서로 총을 가지려고 엉겨붙어 싸우는데, 이때 총이 서랍장 아래로 쏙 들어가버린다. 우스꽝스럽지만 애잔하기까지 한 이 장면이 이병헌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촬영 전날 리허설 때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감독님이 그날 콘티를 다시 그리셨죠.”
극중 만수는 원하는 포지션을 얻기 위해 합격 가능성이 높은 지원자 셋을 해치우는 자신만의 전쟁에 뛰어든다. 이에 범모, 시조(차승원), 선출(박희순)을 차례대로 죽이려 하고, 셋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목숨을 잃는다. 만수의 극단적인 행동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존재하는데, 이병헌은 이러한 만수를 단순한 살인자로만 그리진 않았다. 스스로 어설프고 상대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결국 단행하고야 마는 과정을 촘촘히 표현해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고민했으며, 감독님과 가장 많이 토론을 벌였던 부분이에요. 그나마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처절한 상황에 기대려고 했어요. 한 명이라도 덜 제거하려고 나를 2등에 뒀다가 결국 다른 사람을 다시 올려놔요. 결국 세 사람이나 제거해야 되는 건데, 결국에 첫 살인은 아라의 손을 빌려서 저질렀어요. 이제 둘만 제거하면 된다 하고 시조를 만났는데, 우리 딸과 비슷한 시조의 딸이 등장하죠.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지만 순간 그만두려고 했고요. 만수는 늘 중간의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선출을 만났을 때는 이를 뽑고 나서 팽팽하던 선이 뚝 끊어진 것처럼 전문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죠. 이 변화를 표현하는 게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연기에 힘을 주진 않았다. “보여주려고 하면 중요한 걸 잃을 것 같았”단다. “다 너무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어쩌지 못하는, 막막하고 답답한 처지고요. 길 가다가 누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을 것 같은데, 넘어지는 모습이 또 너무 웃겼어요.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오지만 꾹 참고, 그러면서도 괜찮을지 걱정도 되잖아요. 관객의 마음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좀 더 웃길 수 있었는데 놓쳤다’ 같은 아쉬움은 없었어요. 굳이 노력하지 않았어요.”
이병헌에게 박찬욱 감독은 “고민스러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형”이란다. 2000년대 초반 자신의 할리우드 진출작 ‘지.아이.조’ 시리즈 출연을 놓고도 상담했을 정도다. 그렇게 이병헌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리즈까지 거치며 명실상부 글로벌 스타가 됐고, 이제 거장으로 불리는 박찬욱 감독과 아카데미 레이스를 달리게 됐다. ‘어쩔수가없다’가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초청에 이어 제98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된 덕분이다.
“앞으로 해야 할 새로운 경험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후보작으로 결정된다면 올해 말부터 내년 초까지는 그 일에만 몰두하게 될 거예요. 이 역시 제게 첫 경험이 되겠죠. 그리고 ‘어쩔수가없다’처럼 카메라가 저를 따라다니면서 제 감정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작품을 언제 어떻게 해보겠어요. 제 필모그래피에 가장 자랑하고 싶은 작품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기분 좋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