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감수성의 재발견 [WORK & PEOPLE]

성인지감수성의 재발견 [WORK & PEOPLE]

기사승인 2025-09-24 14:51:59
박정연 노무법인 마로 공인노무사


다소 모호하게 여겨지던 성희롱 판단기준인 ‘성인지감수성’은 이제 판결문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와 법원은 오랫동안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명백한’ 증거와 피해자의 즉각적 반응을 중심으로 판단해 왔다. 피해자의 복합적 감정이나 뒤늦은 신고는 종종 의심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에 균열을 낸 것이 바로 대법원 2018년 판결(2017두74702)이다.

한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뽀뽀를 해주면 추천서를 써주겠다”라는 발언을 하고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하여 해임된 사건에서, 원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낮게 보아 성희롱을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해당 교수의 수업 평가에 최고점을 부여했고, 일부 학생 진술이 번복된 점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뒤집으며 성희롱 사건 판단에서 성인지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성희롱 여부는 행위자의 의도보다 관계·상황·행위의 정도 등을 종합해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즉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거나 이후에도 가해자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피해 사실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도 판시했다. 추천서를 써줄 수 있는 교수라는 지위와, 학점을 받아야 하는 학생이라는 권력관계 속에서 피해자가 처음 접하는 수사·재판 과정에서 진술을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것은 충분히 고려될 만하다는 것이다.

이후 나온 ‘레깅스 촬영 사건’(대법원 2019도16258)은 성인지감수성의 의미를 더 확장했다. 버스 안에서 여성 승객의 하반신을 8초간 촬영한 사건에서, 항소심은 “피해자가 일상복으로 흔히 입는 레깅스를 착용한 장면을 단순히 촬영한 것에 불과하고, 피해자 자신도 성적 수치심을 호소하지 않았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은 단순한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이 아니라 분노·공포·무력감·모욕감 등 다양한 감정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공개된 장소에서 드러난 신체라 해도 본인의 의사에 반해 촬영된다면 성적 대상화로 인한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의 의의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기존의 전통적 범주에서 벗어나, 피해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다층적·구체적 감정에 맞추어 확장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이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되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확인한 최초의 판례로 평가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신체적 접촉을 넘어 불법 촬영이나 성적 시선의 강요 같은 비신체적 행위에서도 침해될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두 판결은 성인지감수성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판단의 필수 요소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인지감수성만으로 성희롱 성립 여부를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피해자의 감정을 존중하면서도, ‘합리적 피해자 관점’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은 감정과 사실, 사회적 맥락과 객관적 판단 사이의 균형 속에서 정의를 구현한다.

성인지감수성의 재발견은 결국 피해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으면서도 법적 판단의 합리성을 지켜내려는 노력이다. 이는 법원의 판례를 넘어, 직장과 일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 성인지감수성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과 감정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글·박정연 노무사
노무법인 마로 공인노무사
주한외국기업연합회(KOFA) HR 칼럼니스트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추천해요
    0
  • 슬퍼요
    슬퍼요
    0
  • 화나요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