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형형색색 기괴하고 아름답지만, 텍스트 위에 습자지를 댄 듯 쉽게 읽힌다. 다만 이병헌의 권유대로 두 번 이상 본다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올 하반기 최고 기대작이자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이야기다.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가 해고된 후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자식과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작품이다. 미국 소설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다.
로그라인 중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은 살인이다. 평생 제지업에 종사했던 만수는 본인이 지원한 포지션의 거짓 공고를 내어 이력서를 받고, 자신보다 합격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식구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던 그가 선택한 방법이다. 극단적인 발상이다.
이처럼 큰 줄기가 공감을 얻기 힘든 내용이지만, 막상 몰입도는 상당하다. 만수가 경쟁자들을 모두 해치울 때까지는 전개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이 전개를 함께하는 모든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
이병헌은 역시 이병헌이다. 면접에서 다리를 어찌하지 못할 만큼 불안해하던 만수가 세 번째 살인 후 경찰에게 너스레까지 떠는 인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그러나 작위적이지 않게 그려낸다. 아라 역의 염혜란도 돋보인다. 뱀이 문 만수의 다리를 빠는 입술, 난투극으로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드러난 어깨, 그간 그에게서 떠올리지 못했던 빨간빛이 관객을 압도한다. 단순히 성적 코드로만 소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다.


박찬욱 감독이 자신한 대로 웃음 포인트도 많다. 미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겠다고 선언하자 아들 시원(김우승)이 넷플릭스 콘텐츠를 재생해 시그니처 사운드가 울려 퍼지는 장면부터 작정하고 만든 듯한 만수·범모(이성민)·아라의 ‘고추잠자리’ 신까지, 박 감독 표 고급 유머가 주는 만족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제지업 종사자인 주요 인물들이 종이를 활용해 주고받는 말장난에도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만수가 취업에 성공한 후로는 어쩐지 힘이 빠진다. AI(인공지능)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인력 감축의 명분을 찾은 회사 공장에는 오직 만수 혼자다. 이젠 기술자가 아닌 기계가 종이의 품질을 체크하지만, 만수는 고집스럽게 직접 종이를 두드려본다. 이 대목에서 종이는 더 이상 종이가 아닌, 인간(아날로그)으로 확실히 치환된다. 만수가 극한으로 몰릴수록 심해지는 치통도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준다. 마지막 살인을 앞두고 상한 이를 자력으로 뽑는 장면은 이병헌의 표현력과 별개로 진부함을 더한다.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을 보는 재미는 여전히 쏠쏠하다. 특히 만수의 집은 음습하다가도 곳곳이 아름답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서도 단란해 보이는 만수 가족과 착 달라붙는다. 여기에 만수가 몸담는 공장은 물론, 분재에 능한 그가 한 시체를 처리한 방식마저 서늘할 만치 아름답다.
전작 ‘헤어질 결심’처럼 짙은 여운을 기대한다면 물음표다. 박찬욱 감독이 장인처럼 배치한 디테일을 두 번 이상 큰 스크린을 통해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눈 높은 한국 관객이 그 두 번의 기회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어쩔수가없다’. 상영시간 139분, 15세 이상 관람가, 24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