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우(牛)’에 획 하나를 더하면 ‘생(生)’이 된다. 우리는 그 생을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 작년 한 해 도축소 111만여 두. 평균 출하월령 42.3개월. 전년 대비 1.2개월이 더 짧아졌다. 숫자 앞에 생은 위태롭다. 누군가는 바닥에 일(一) 하나를 그어 소가 설 자리를 만든다. 새벽마다 쇠죽을 뜨고, 털을 빗기고, 걷게 한다. 강가에 앉힌 뒤 풀 뜯는 입을 오래 본다. 싸움소의 우주(牛主)들은 그 시간을 ‘동행’이라 부른다. 함성 없는 축사에서 소와 사람이 나란히 걷는다. 그 느린 걸음을 가까이서 기록한다. <편집자 주>
추석 분위기가 무르익은 7일 경남 의령군 의령민속경기장. 핑크빛 꼬리가 춤을 춘다. 꽃핀을 단 700kg 황소 ‘초롱이(4)’다. “사진 찍어도 돼요?” 초롱이 팬인 도영주(10)·도영재(8) 형제가 묻는다. 김두철(55) 우주(牛主)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나던 싸움소 마니아들은 초롱이가 전형적인 황소의 얼굴을 가졌다고 입을 모은다. 비녀형옥뿔이 좌우로 길게 뻗었다. 이름 따라 눈빛은 맑고, 귀는 수평으로 곧다. 김씨는 “사람으로 치면 원빈 같은 얼굴”이라고 평가한다. 초롱이 얼굴을 보러 관중이 천천히 모였다. 이날의 키워드는 승부가 아니라 ‘만남’이었다.


아빠, 싸움소로 키워봐요
초롱이는 원래 비육우였다. 30개월 무렵 도축될 운명이었다. 우주의 딸 김하은(25)씨는 초롱이를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었다. “워낙 사람을 잘 따르고, 똘망똘망했어요.” 그에게 초롱이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 같은 존재였다.
하은 씨가 찾은 방법은 ‘소싸움’이었다. 싸움소로 등록되면 오랫동안 사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주일 동안 아버지를 설득했다. 마침내 초롱이는 다른 송아지들과 대련할 기회를 얻었다. 머리를 맞댄 초롱이의 모습에서 하은 씨는 싸움소의 기질을 봤다. 이후 초롱이는 싸움소로 등록됐고, 톱밥이 깔린 위생적인 우사로 자리를 옮겼다.
올해 네 살이 된 초롱이는 여전히 싸움소로 살아가고 있다.


여러분, 초롱이 귀여운 것 좀 보세요
초롱이는 ‘우(牛)플루언서’다. 하은씨는 “이 귀여운 걸 혼자 보기 아까워서” 2년 전부터 초롱이의 일상을 촬영해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개하고 있다. 올여름 공개한 게시물이 큰 관심을 받으면서 총 조회수 1000만회를 넘겼다.
릴스가 퍼지자 댓글이 달렸다. 팬들의 요청도 쏟아졌다. 이날 초롱이가 입은 핑크색 옷은 한 팬의 제안이었다. 수원에서 반려견 의상을 만드는 전채린(35)씨가 직접 제작해 선물했다. “대형견은 70kg 정도가 한계인데, 초롱이는 무려 700kg이더라고요.” 가정용 미싱으로 한 땀씩 박아 만든 초롱이 옷은 총길이 2m, 무게 5kg이다.
하은씨는 이날 초롱이의 얼굴이 새겨진 아크릴 열쇠고리 굿즈 100개를 팬들에게 전달하며 관심에 화답했다. 사전에 신청받은 프린팅 티셔츠도 100여 장이 제작돼 팬들에게 돌아갔다. 팬들은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을 찾아 인증샷을 남겼다. 초롱이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팬들은 그 기록을 통해 서로 연결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류는 다시 새로운 기록으로 이어졌다.


초롱이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정민경(24)씨는 지난 7월 우연히 초롱이 관련 게시물을 접했다. 그가 눈길을 멈춘 건 초롱이가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이날은 반대로 초롱이가 싱겁게 이겼다. 상대인 ‘로봉순’이 초롱이와 머리를 맞대기도 전에 물러섰다. 싸움소 경기에서 등을 돌리면 경기는 끝난다. ‘싫으면 멈춘다’는 싸움소 보호를 위한 경기장의 절대 원칙이다. 관중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날의 목적이 ‘승패’가 아니라 ‘만남’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씨는 대전에서 2시간이 걸려 의령까지 왔다. 그는 초롱이가 좋아하는 티모시풀(토끼용 사료 풀)을 꺼내 직접 먹여줬다. 며칠 전 온라인몰을 뒤져 미리 주문할 만큼 이날을 기다렸다. 그는 경기장 분위기가 “평소 응원하는 팀인 한화이글스 야구장처럼 승패 여부보다는 그냥 다 함께 응원하는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팬들과 함께 써 내려가는 소싸움의 미래
하은 씨는 초롱이에게 바라는 점을 묻는 말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깡패(16)·강남스타(16) 모두 팬이 많았다”며 “팬이 많으면 오래 사는 것 같은데, 초롱이도 그 길을 따라가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한 사람이 오래 보고 싶어 선택한 싸움소의 길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응원한다. 누구도 과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이들의 생을 지지한다. 이날도 초롱이는 수많은 팬을 만났다. 사진을 찍고, 잠시 인사를 나눴다.
도축 대신 동행을 택한 ‘우(牛)플루언서’ 초롱이는 팬들과 함께 내일의 소싸움을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