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책이 또 바뀔까 봐 교재를 펼치기가 두렵습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교사 최모(27)씨는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를 둘러싼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에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AI 교과서가 ‘필수’라고 하더니, 정권이 바뀌자 ‘권고’로 물러섰고, 최근에는 다시 교과서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이제는 언제 또 입장이 바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AI 디지털교과서는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교육 정책 중 하나였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에 맞춘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겠다며 올해 1학기부터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영어·수학·정보 과목에서 시범 운영이 시작됐다.
하지만 정책은 도입 초기부터 더불어민주당의 반대에 부딪혔고, 지난해 12월 민주당 주도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AI 교과서는 학교의 의무 채택이 필요 없는 ‘교육자료’로 격하될 위기에 놓였다. 당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가까스로 교과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정권 교체 이후에는 “교과서 지위가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윤석열 정부의 성급한 AI 교과서 도입으로 교육 현장이 혼란에 빠졌다”며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바꿔 자율 선택권을 보장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런 기조에 따라 학교 현장에서도 ‘교과서가 곧 폐기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지난 2일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AI 교과서 지위를 ‘교육자료’로 격하하는 내용을 담은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상정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교육계 일각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의 AI 중시 기조가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됐다.
교육위 소속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안이 상정되지 않은 것은 교육부가 마지막으로 정책을 정리할 시간을 드리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교육부 역시 “대통령 공약 이행 방안을 포함해 다양한 대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교과서와 교육자료는 현장에서 차이가 크다. 교과서는 학교가 의무적으로 채택해야 하지만, 교육자료는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쳐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실제로 교재 지위에 따라 채택률도 달라진다. 지난 3월 기준 전국 1만1932개 초·중·고교 가운데 AI 교과서를 1종 이상 채택한 학교는 3870곳으로, 채택률은 32%에 그쳤다. 서울시교육청은 정책 불확실성이 계속되자 올해 2학기 교재 신청 접수를 중단했다.
현장에서는 혼선이 더 큰 교육격차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중학교 교사 A씨는 “학생들의 미디어 활용 능력에 따라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며 “교과서가 교육자료로 바뀌면 학교 간, 학생 간 도입 수준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필수로 쓰라고 할 땐 의견을 듣지 않더니, 권고로 바뀌자 그제야 사용 여부를 묻더라”며 “정책이 계속 바뀌어 준비조차 어렵다”고 했다.
정책 신뢰가 흔들리면서 교재 발행사들의 법적 대응도 이어지고 있다. 천재교과서, YBM 등 일부 출판사는 지난 4월 교육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정책 번복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며 정부에 책임을 따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