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불시착’도 팔린다…통제의 도시에 퍼지는 시장경제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사랑의 불시착’도 팔린다…통제의 도시에 퍼지는 시장경제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기사승인 2025-08-01 15:55:07 업데이트 2025-08-01 15:56:43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한다.


1. 생명이 살아 있는 계곡과 같은 북한 시장경제 연구

북한 연구를 등산에 비유하면 많은 연구자가 산의 정상 즉 핵, 권력, 지도자 연구(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에 집중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시야와 성취감이 있지만, 실제로 그곳엔 죽은 나무와 돌만 남아 있다. 북한학에서 정상에 해당하는 주제들은 이미 수많은 연구와 논쟁으로 닳고 닳아, 새로운 생명력이나 현장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반면 계곡은 등산로에서 자주 외면 받지만 그곳엔 이름 모를 꽃, 새, 짐승, 물고기 등 생명이 살아 숨 쉰다. 북한학에서 이 계곡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시장경제 연구이다. 북한의 시장화 현상은 1990년대 경제난 이후 암시장(장마당)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전국적으로 400여 개의 공식 시장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로 확산했다. 시장은 북한 주민들의 생존, 부의 축적, 사회 변화의 중심축이 되었고, 국가도 시장의 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해 제도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시장경제 연구는 북한 내부의 다양한 경제 주체(돈주, 상인, 농민 등)와 비공식 경제, 생존 전략, 사회적 변화를 다루며, 북한 사회의 역동성과 미래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정상에서 보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의 진짜 삶과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영역이다.

“북한 경제의 시장화에 관한 연구는 시장화 확산 자체가 북한 당국의 통제력 약화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북한 체제의 변화를 평가,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북한 연구의 진정한 생명력, 미래의 변화 동력은 정상(권력 연구)이 아니라 계곡(시장경제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북한학이 진정으로 북한 사회의 내면과 변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정상만을 목표로 하지 말고 계곡을 따라가며 생명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노력이 적실히 필요하다. 평양의 시장경제는 단순한 상거래를 넘어, 북한 주민들의 생존과 변화 그리고 사회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경제 생태계이다. 이 글에서는 평양 시장경제의 주체와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력과 변화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평양의 경제주체

① 국가

평양의 경제는 여전히 국가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중심을 잡고 있다. 중앙당 청사와 내각 건물, 군부대가 자리한 평양의 중심가는 ‘계획경제’라는 이름 아래 자원과 인력이 배분되고, 각종 정책이 내려오는 곳이다. 하지만, 이 국가라는 주체도 이제는 시장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국가가 직접 장마당을 관리하거나, 공식적으로 시장세를 걷는 모습은, 평양의 경제가 더 이상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아침 7시, 평양의 중심가 김일성 광장. 회색 양복을 입은 남성들과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여성들이 줄지어 중앙당 청사로 들어선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흐른다. 이곳은 평양 경제의 심장, 모든 정책과 자원이 설계되는 곳이다. 중앙당 청사에선 오늘도 ‘생산계획’이 내려온다. “만경대 트랙터 공장, 이번 달 1,000대 생산!”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건물을 나서는 간부들의 속삭임엔 현실의 무게가 담겨 있다. “배급이 줄었는데, 공장 사람들 다 나올 수 있을까?” 이렇게 국가라는 톱니바퀴가 경제를 돌리지만, 그 거대한 기계에도 틈이 생기고 있다.

② 무역회사

평양 시내에는 ‘XX무역회사’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들이 곳곳에 있다. 이들은 국가기관 산하에서 운영되지만, 실상은 외화벌이와 물자 조달, 수출입 등에서 민간기업 못지않은 활력을 보인다. 대형 무역회사는 수출입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 경제의 숨통을 틔우고, 중소 무역회사는 평양 시민들의 생필품과 사치품을 공급한다. 이 과정에서 ‘돈주’로 불리는 신흥 부자들이 등장하고, 무역회사와 결탁해 새로운 경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평양 보통강구역, ‘광명 무역회사’라는 간판이 붙은 3층 건물. 이곳엔 매일 고급 승용차가 드나든다. 건물 안, 30대 남성 김철수(가명)는 중국 바이어와 영상통화를 한다. “이번엔 스마트폰 500대, 쌀 10톤 부탁하오.” 그의 책상엔 달러 뭉치와 중국산 담배가 놓여 있다. 김철수는 이름뿐인 ‘국영회사’ 직원이지만, 사실상 돈주(신흥 부자)와 손잡고 외화벌이에 나선다. 그가 조달한 쌀과 스마트폰은 곧바로 장마당으로 흘러들고, 평양 시민들의 생필품이 된다. 무역회사와 돈주의 결탁, 이것이 평양 경제의 새로운 혈관이다.

③ 노동자

평양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국가가 정해준 일터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침마다 공장으로 출근하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거나, 가내수공업에 종사한다. 어떤 이들은 택시 운전, 식당 운영, 심지어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의 손끝에서 평양의 시장경제는 하루하루 살아 움직인다.

새벽, 대동강 변의 한 아파트. 40대 여성 라영희(가명)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는다. “오늘은 100그릇은 팔아야 해.”, 남편은 국영공장에 출근하지만, 월급으론 생계가 어렵다. 라영희는 집에서 국수를 만들어 장마당 좌판에 내다 판다. 장마당에선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20대 청년 리철민(가명)은 중고 자전거를 수리해 판다. 택시 기사 곽성호(가명)는 손님을 태우고, 손님이 건네는 달러에 미소 짓는다.

한편, 퇴직 군인 김기남(가명)은 중국산 휴대전화를 팔며 “이거 남조선 드라마도 볼 수 있다오.”라고 자랑한다. 이렇게 평양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장경제’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④ 소비자

평양 시민들은 이제 배급소보다는 시장을 더 자주 찾는다. 장마당에는 중국산 의류, 전자제품, 식료품, 심지어 남한산 드라마 DVD까지 진열되어 있다. 소비자들은 가격을 흥정하고, 품질을 따지며, 현금이나 달러, 위안화로 결제한다. 시장에서의 소비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작은 사치와 일상의 즐거움,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다.

평양 락랑구역의 ‘토성 새벽시장’. 이른 새벽부터 50여 개 좌판이 늘어서고, 주부들은 손에 쥔 위안화와 달러를 번갈아 세어본다. “이 옷 중국산 맞아요? 더 깎아줘요!”, “이 고기는 어제 들어온 거라오, 오늘 다 팔릴 거요!” 시장 한편에선 10대 소녀들이 몰래 남한 드라마 DVD를 흥정한다. “언니, 이거 ‘사랑의 불시착’ 맞아요?” 소비자들은 이제 배급소보다 시장에서 더 많은 선택과 자유를 누린다. 이곳은 생존의 공간이자, 작은 사치와 정보 교환의 장이다.

3. 평양의 이중경제구조

① 계획경제

평양의 주요 산업, 대형 공장, 국영기업, 군수공장 등은 여전히 국가의 손아귀에 있다. 국가가 정한 생산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배급과 임금도 국가가 책임진다. 하지만 배급량은 줄고, 임금은 생활비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획경제의 강’을 건너, 다른 강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만경대 트랙터 공장, 평양 제철소, 대동강 맥주 공장. 이곳에선 여전히 국가가 정한 생산계획에 따라 기계가 돌아간다. 하지만 공장장 이태호(가명)는 말한다. “계획대로 만들라지만, 자재도 부족하고, 사람도 부족하오. 배급은 줄고, 월급으론 쌀 한 포대도 못 사오.” 그래서 공장 노동자들은 점심시간마다 몰래 장마당에 들러 쌀과 반찬거리를 산다. 국가의 강을 건너, 시장의 물결에 발을 담그는 것이다.

② 시장경제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평양에도 장마당이 생겼다. 처음엔 몰래, 나중엔 공식적으로. 이제는 평양 시내 곳곳에 수십 개의 장마당이 들어서고, 공식 시장뿐 아니라 골목마다 ‘메뚜기 시장’이 펼쳐진다. 시장에서는 돈주, 상인, 여성, 청년 심지어 퇴직한 군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판다. 공식과 비공식, 국가와 민간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두 경제구조가 한 도시에서 공존한다.

오늘날 평양의 시장경제는 국가와 민간, 공식과 비공식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는 가운데, 신흥 자본가의 부상, 정보 네트워크의 확산, 유통 체계의 복합화 등 다양한 변화가 맞물리며 역동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억압과 제약 속에서도 스스로 적응하고 진화하는 힘을 보여주며, 북한 경제의 구조적 변동과 새로운 질서 창출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평양 시장경제 21가지 요소

① 여성

북한에서 남성은 전통적으로 국영공장, 기업소 등 국가가 지정한 일터에 출근하는 경우가 많으며, 국가의 통제와 감시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적용된다. 반면에 여성은 국가의 공식 경제 영역에서 벗어나 시장, 가내수공업, 도매·소매, 비공식 거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계수입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시장경제에서 진짜 주인공은 여성이다. 장마당 좌판에 앉아 채소를 팔고, 가내에서 국수를 뽑아내다 팔고, 도매상과 협상하는 이들도 대부분 여성이다. 라영희(가명)는 말한다. “남편 월급으론 살 수가 없어요. 내가 장마당에서 번 돈이 집안 살림의 전부라오.” 경제난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은 가족의 생존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까지 확대하고 있다.

② 부(富)

부의 축척은 북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 약화하고 시장 경제 요소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국가의 통제와 제재, 공급 부족, 제도적 허점, 권력 구조의 변화 등이 맞물리면서, 비공식 경제와 사적 이익 추구가 부의 주요 경로로 자리 잡은 것이다. 

부의 7가지 종류로는 돈주, 무역회사, 부동산, 운송업, 합의제 식당, 밀수, 뇌물이 있다. 돈주라는 신흥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면서, 평양에는 고급 아파트, 수입 자동차, 고가의 전자제품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무역회사, 국영기업, 권력기관과 결탁해 부를 축적하고, 때로는 시장의 규정을 바꾸기도 한다. 평양 모란봉구역, 고급 아파트 단지. 검은색 벤츠가 들어서고, 40대 남성 김철수(가명)가 내린다. 그는 무역회사와 결탁해 외화를 벌고, 고급 아파트와 수입 전자제품, 심지어 남한산 스마트폰까지 소유한다. 이들이 바로 평양의 돈주, 신흥 자본가 계층이다.

③ 권력

북한의 권력 구조는 통제를 중심으로 여러 공식 및 비공식 조직이 얽혀 있으며, 각각의 조직이 체제 유지와 사회 통제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권력 기반은 다음과 같다. 7가지 권력의 종류를 보면, 중앙당, 안전원, 교육, 비공식 경제, 거간꾼, 농장, IT가 있으며 시장경제의 성장과 함께 권력과 신흥자본가가 결합하여 정경유착을 만든다.

돈주 김철수는 가끔 권력기관 간부에게 뇌물을 건넨다. “이번에 새 시장 진입 허가 좀 부탁하오.” 이렇게 경제적 부와 권력이 결합하며, 시장 진입장벽과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는 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5. 평양 시장경제의 미래와 그 의미

평양의 시장경제를 바라볼 때마다 한 도시의 변화가 얼마나 놀랍고도 강인한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될 수 있는지 새삼 느낀다. 오랫동안 ‘계획’과 ‘통제’라는 이름 아래 숨죽여 있던 경제의 맥박은, 이제 장마당이라는 새로운 심장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지만, 그 틈새마다 시장의 힘이 스며들고, 그 안에서 평양 사람들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변하고 있다.

평양의 시장경제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억압과 통제의 벽을 스스로 허물며,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의 발현이다. 여성들이 장마당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돈주들이 과감하게 자본을 굴리며, 청년들이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정보와 꿈을 교환하는 모습은 평양이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앞으로 평양의 시장경제는 더욱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진화할 것이다. 공식과 비공식, 국가와 민간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정보와 자본, 물류의 흐름은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물론 국가는 여전히 통제와 감시, 세금이라는 무기로 시장을 조절하려 하겠지만, 이미 시장의 힘은 그 어떤 억압보다도 더 깊고 넓게 평양 시민들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이 변화의 파도가 단순히 경제적 풍요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평양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꿈, 도전, 그리고 자존의 서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장마당에서 새로운 거래를 성사하고, 누군가는 집에서 만든 국수 한 그릇에 가족의 희망을 담아 시장에 내다 판다. 이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평양이라는 도시 전체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평양의 시장경제는 더 이상 그림자 속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 그리고 미래를 향한 소망이 어우러진 살아 있는 ‘경제의 숲’이다. 이 숲이 앞으로 더욱 울창해지고, 그 안에서 평양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와 번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변화의 물결이 결국 평양을, 그리고 북한 전체를 더 밝고 역동적인 내일로 이끌어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변화의 중심에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평양의 보통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곽인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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