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폐 기로에 놓인 석유화학업계에 대한 구조조정 가이드라인이 공개된 가운데, 업계 일각에선 구체적인 후속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만 정부가 ‘기업의 자율적인 사업재편에 따른 지원 기조’를 거듭 강조하고 있어, 연말이 포함된 올 4분기를 기점으로 정부-업계 간 협상모드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20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산경장)’를 토대로 정부는 △과잉 설비 감축 및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 △재무 건전성 확보 △지역경제·고용 영향 최소화 등 ‘구조개편 3대 방향’을 공개했다.
이날 정부는 △3개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구조개편 동시 추진 △충분한 자구노력 및 타당성 있는 사업재편계획 마련 △정부의 종합지원 패키지 마련 등 ‘정부지원 3대 원칙’을 확정했다.
이후 업계는 10개 주요 석유화학기업이 참여하는 사업재편 협약을 체결하고, △270~370만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Naphtha Cracking Center) 감축 △고부가·친환경 제품으로의 전환 △지역경제 및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최소화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자율협약을 토대로 석화기업들은 설비 감축·고부가 전환을 통한 경쟁력 강화, 재무구조 개선 등을 포함한 사업재편 계획을 올해 말까지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날 산경장에서도 우선적인 자율 사업재편을 강조했다. 구 부총리는 “소위 ‘버티면 된다’,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라는 안이한 인식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으며,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언급했으며,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책임 있는 자구노력 없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려 하거나 다른 기업들 설비 감축의 혜택만을 누리려는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업계에선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제시되지 않은 데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었던 지난해 12월 정부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내놓고 사업 구조개편에 대한 금융 지원, 산업 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 및 고용 유지 지원, 친환경 제품 사업 전환 지원 등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업계에선 단순 금융 지원, 세제 혜택 수준을 넘어 기업 간 구조조정을 위한 공정거래법 한시 완화 등 직접적인 규제 완화가 후속 조치를 통해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는데, 이번 구조개편 계획에 이러한 내용이 담기지 않아 사실상 이전에 발표한 방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석화업계 한 관계자는 “탄핵 정국과 조기 대선 속에 정부 주도 구조개편안이 당초 계획보다 지체되면서 업계의 상황은 우려보다 더 크게 악화됐다”며 “그간 업계 내에서도 자구노력을 이어오며 체질 개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뚜렷한 제안도 동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이 마련한 사업재편 계획에 따라 적극적인 지원책이 마련될 것이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장은 방향성만 제시했지만, 기업들의 개별 계획이 얼마나 명확히 나오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지원 방안도 차차 밝힐 것”이라고 밝혔다.
관건은 시간 싸움이다. 지난 3~4년간 중국발 범용제품 공급 과잉 등 여파에 따라 국내 주요 석화기업 4사(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의 올해 상반기 합산 영업손실은 4762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약 7배나 치솟았다. 잇따른 공장 가동 중단으로 주요 시설의 평균가동률 역시 급감했다. 정부가 연말까지 기업별 사업재편 계획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이마저도 빠듯하단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날 구 부총리는 “기업과 대주주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토대로, 구속력 있는 사업재편 및 경쟁력 강화 계획을 연말이 아닌 ‘당장 다음 달’이라도 제출하겠다는 각오로 속도감 있게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