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달러 펀드’…한국 반도체에 남는 것은 [K-반도체, 생존의 조건①] 

‘3500억달러 펀드’…한국 반도체에 남는 것은 [K-반도체, 생존의 조건①] 

기사승인 2025-09-01 06:00:07 업데이트 2025-09-01 07:32:52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과 미국이 합의한 3500억달러(한화 약 48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구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조선, 반도체 등 전략 산업을 내세웠지만, 실제 배정액과 사용처는 불투명하다. 반면 중국은 664조원 수준의 ‘빅펀드 3기’를 출범시키며 글로벌 패권 경쟁에 본격 가세했고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도 수십조원대 지원책을 가동 중이다. 치열한 투자 전쟁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 전략이 시험대에 올랐다.

1일 산업자원통상부, 업계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한·미 통상 합의 직후 “3500억달러 규모 공동 투자펀드에 조선, 반도체를 포함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 1500억달러는 조선협력펀드에, 2000억달러는 첨단산업펀드에 투입될 예정이다. 반도체에 얼마가 배정될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실무 TF가 세부 집행 방안을 논의 중이지만, 정부는 “대출·보증 중심 운용 방침”만을 밝히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조선과 반도체를 모두 담는다면 실제 반도체 몫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며 “투자금이 설계, 장비, 인재 등 취약한 분야로 직접 꽂히지 않는다면 보여주기식에 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 배정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며 “펀드 활용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국내에서 배정 규모와 활용 방향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외 변수도 겹치고 있다.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 반도체 기업 지분 확보 방안을 거론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첫해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고 주장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조만간 열릴 한·미 실무협의에서 펀드 운용 방식과 이익 배분 구조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클린룸. 삼성전자 제공

해외는 ‘현금 지원’ 올인…한국은 ‘대출·보증’ 치중
 
한국이 펀드 구조를 고민하는 사이, 중국은 이미 ‘올인 작업’에 나섰다. 중국은 올해 5월 3440억위안(약 64조원) 규모의 빅펀드 3기를 출범시켰다. 1·2기에 이어 세 번째로 조성된 이번 펀드까지 합치면 누적 120조원 이상이 반도체에 투입되는 셈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도 ‘국가 단위’ 투자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처럼 해외 주요국이 반도체 지원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반도체가 군사·산업·디지털 경제 전반의 핵심 전략 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정부 보조금으로 기업 투자 리스크를 줄이고, 자국 내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판단에서다.

미국은 2022년 CHIPS법을 통해 527억달러(약 73조원)를 반도체 산업에 지원하고 생산시설 보조금 390억달러, R&D 지원 132억달러를 집행 중이다. 여기에 25% 세액공제 혜택을 더했다. EU는 430억유로(약 62조원)를 투입하는 유럽반도체법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은 라피더스와 TSMC 구마모토 공장에 수조원대 보조금을 지원하며 재도약을 도모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현금 지원’에 방점을 둔다는 것이다. 대출이나 보증이 아닌 직접 보조금으로 기업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정부는 지난해 26조원 규모의 ‘반도체 종합지원 패키지’를 내놨다. 국책은행을 통한 17조원 저리 대출, 1.1조원 반도체·팹리스 펀드, 2.5조원 클러스터 인프라 지원, 시설투자 세액공제 확대 등이 골자다. 이 중 실제 이뤄지는 정부의 재정 투입은 약 8조원 정도이며 나머지는 한국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의 대출·보증 형태다. 지원의 70% 이상이 금융 지원에 치우쳐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대출과 보증은 결국 기업이 갚아야 할 돈”이라며 “해외처럼 현금 보조금이 아니다 보니 실질적 투자 여력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학과 석좌교수도 "저금리 대출은 중소·중견기업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보조금 형태로 지원해야 실질적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중국 방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투명한 운영과 선순환 구조 구축이 핵심" 
 
전문가들은 3500억달러 펀드 활용에 앞서 근본적 투자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문형남 숙명여대 경영정보대학원 교수는 “결국 중요한 것은 운영 방식”라며 “펀드가 한국 산업과 경제, 그리고 글로벌 파트너십 강화에 실질적 기여를 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짚었다.

그는 “독립적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고 양국 민간 전문가가 참여해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며 “해외 투자를 통해 확보한 기술과 네트워크를 국내 산업·인재 양성과 연결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 단위 펀드는 정치적 목적이 아닌, 기술·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 아래 운영해야 한다”며 “한미 공동 펀드는 단순히 해외 투자에 머물지 않고, 국내 기업과 연구기관이 글로벌 밸류체인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혜민 기자
hyem@kukinews.com
이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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