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대위기에 직면한 국내 석유화학업계에 ‘선(先) 자구, 후(後) 지원’ 기조를 거듭 강조하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율적 사업재편’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다만 기업 간 해소해야 할 문턱도 존재해 정부와 발을 맞춰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12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GS칼텍스와 여수 NCC(나프타분해시설) 통·폐합 등 구조개편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이 여수 NCC 공장을 GS칼텍스에 매각하고, LG화학-GS칼텍스 간 합작법인(JV)을 만들어 통합 운영하는 방식이 유력 거론되고 있다.
앞서 정부가 석화업계 자율 구조개편안 마감을 올해 안으로 규정하면서 업계는 자율개편으로 연 270~370만톤 규모의 NCC를 감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국내 주요기업 나프타 생산능력인 1470만톤의 18~25% 수준이다.
이행 방안으로 △균등 감축 △기업 간 설비 통합 △정유-석화 수직계열화 및 중소형 설비 우선 정리 △노후 설비 중심 감축 등이 언급되는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자 효율적인 방안으로 꼽히는 정유-석화 수직계열화를 모색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LG화학 여수 NCC는 1공장 연 120만톤, 2공장 연 80만톤 등 총 200만톤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GS칼텍스는 올레핀 생산시설(MFC, Mixed Feed Craker)을 통해 연간 90만톤의 에틸렌 생산이 가능하다. 양사 JV가 설립된다면, 정유사가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한 나프타를 곧장 석화설비에 투입함으로써 원료비·운송비 등 원가를 낮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양사 공장은 여수산단 내에서도 인접해 있다.
LG화학 외에도 HD현대오일뱅크-롯데케미칼(지분 60%·40%)이 충남 대산 석화단지에 합작 설립한 HD현대케미칼이 정부 발표 이전부터 구조개편을 논의 중이며, 롯데케미칼과 여천NCC(한화솔루션-DL케미칼)는 일부 설비를 줄이고 산출물을 공동 활용하는 방안 등을 폭넓게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대규모 기간산업을 영위하는 기업들 간의 통·폐합 논의인 만큼 현실적인 해결과제들도 뒤따른다.
LG화학-GS칼텍스 간 구조개편 논의에선 GS칼텍스 지분 절반을 보유한 미국기업 셰브론의 역할이 관건이다. 최근 셰브론의 브랜드 피시(Brant Fish) 국제 다운스트림 부문 사장이 한국의 정유·석화 부문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미 MFC를 보유하고 있는 GS칼텍스의 기업결합까지 동의할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단, 양사는 이번 안건과 관련해 아직까진 “다양한 NCC 경쟁력 강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내용 중 하나”라는 입장이다.
HD현대케미칼 통·폐합과 관련해 롯데케미칼은 자체 NCC를 HD현대오일뱅크에 넘기는 대신, 현행 6(HD현대오일뱅크)대 4(롯데케미칼)인 지분을 5대 5로 조정해 경영권을 반분하고, 현금 또는 현물의 추가 출자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업황 악화 속 양사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기업 간 재무·지분 상황 등 입장차를 줄여 효율적인 방안을 도출하려면, 정부 차원에서도 ‘조건’을 기다리는 것과 동시에 업계와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석화업계 한 관계자는 “미시적으론 기업 간 결합 측면에서 공정거래법 등 우려사항들이 있고, 넓게 보면 중견·중소업계 및 지역경제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면서 “업계의 자구노력과 별개로 정부에서도 꾸준한 대화를 지속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지난주 ‘석유화학업계 사업 재편 관련 민관 협의체’ 첫 회의를 열고 정부-업계 간 수시 대화를 지속할 계획이다. 해당 협의체에는 한국화학산업협회, 정유-석화기업 10개사,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민관이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