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돈주와 하이브리드 생존경제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평양 돈주와 하이브리드 생존경제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권력과 자본의 비공식 헌법

기사승인 2025-09-28 08:00:06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한다.

1. 역설적 위기에서 기회로: 돈주의 탄생

1990년대 중반,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전대미문의 사회·경제적 붕괴를 겪었다. 이 시기는 구소련 붕괴로 동맹국 지원이 끊기고,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했으며, 계획경제의 생산·배급 체계가 급속도로 무너진 시기다.

과거에는 평양에서 신의주, 함흥, 청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민이 국가로부터 식량과 필수품을 배급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배급은 중단되거나 극도로 축소됐고, ‘국가가 더 이상 우리를 먹여 살리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주민들 사이에서 뿌리내렸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구책을 찾았다. 공식 경제가 멈추자, 장마당(시장)이 자발적으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개인이 소지품을 팔거나, 지방에서 농산물을 가져와 거래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장마당은 점차 규모와 조직이 커졌고, 각종 상품, 식료품, 의복, 전자제품, 심지어 외국산 상품까지 거래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 속에서 탄생한 집단이 바로 ‘돈주’다. 돈주는 문자 그대로 돈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장마당 상인이 아니라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활용해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국가권력과도 거래하는 신흥 경제 세력을 의미한다. 초기 돈주는 밀수업, 소규모 무역, 농산물 유통 등 주변부 경제 활동을 발판으로 삼았다. 이후 국가기관 관계망을 이용해 공장을 비공식 임대하거나, 국영 기업의 생산설비를 재가동하는 등 기존 국가 시스템의 틈새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2. 돈주의 확장 궤적과 혼합 경제 생태계

배급이 사실상 붕괴한 이후, 돈주 계층은 북한판 자본주의적 주체로 부상했다. 자본력과 인맥을 겸비한 이들은 시장 단위의 단순 거래를 넘어, 북한 내부의 산업·건설·무역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공장 임대 및 가동

2000년대 이후 북한 전역에 방치된 국영 공장이 늘어났다. 돈주는 해당 공장을 당국으로부터 비공식 임대해 생산을 재개했다. 원자재는 중국 등 외부 네트워크를 통해 조달했고, 생산품은 다시 평양과 지방의 장마당에 유통했다.

▶아파트와 인프라 건설

평양의 여명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등 신도시 개발에도 돈주들이 깊이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돈주는 건축 자재를 직접 수입하거나 지방 생산물을 활용하고,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당국과 협력 관계를 맺어 ‘조인트 벤처’ 성격의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무역과 외화 조달

무역 부문에서도 돈주는 핵심 축이었다. 일부는 중국 단둥,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소비재, 기계 부품, 식자재를 들여왔고, 동시에 북한산 해산물, 광물, 목재 등을 밀수·수출 형태로 해외에 팔아 외화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사실상 소멸한다. 북한 법체계상 이러한 거래는 대부분 비공식이지만, 권력층과의 뇌물·리베이트 거래를 통해 사실상 묵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경제 내부에는 국가계획과 시장 메커니즘이 절충된 ‘하이브리드 생존경제’가 자리를 잡았다.

3. 평양 하이브리드 생존경제 : 삼각 구조와 비공식 헌법

현재 평양의 경제를 지탱하는 구조는 중앙당(정치권력)–돈주(자본)–시장(거래망)이라는 삼각 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중앙당 ↔ 돈주

중앙당은 돈주에게 단속 면제, 사업권 부여, 수입·수출 허가 등의 특권을 부여한다. 대신 돈주는 외화를 당국에 납부하고, 아파트·도로·상점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자금을 지원한다.

▶돈주 ↔ 시장

돈주는 농산물, 소비재, 가전제품 등 주민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 시장에서의 판매를 통해 자본을 불린다. 이익의 상당 부분은 다시 무역, 건설, 제조에 재투자된다.

▶시장 ↔ 중앙당

시장 관리 인력과 보안원은 상인들로부터 ‘자릿세’와 각종 수수료를 징수하며, 동시에 주민 동향과 여론을 당에 보고한다.

이 삼각 구조는 일종의 ‘비공식 헌법’처럼 작동한다. 법 문서에 명문화되지 않았지만, 이 시스템 없이는 평양의 경제 생태계가 돌아가지 않는다.

4. 평양 하이브리드 생존경제의 딜레마

평양의 하이브리드 생존경제는 북한 고유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자생적으로 발전한 시장경제(장마당)가 공존하는 독특한 경제 구조를 의미한다. 이 시스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국가 배급 시스템이 붕괴하자,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비공식 시장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본격화했다.

북한은 여전히 사회주의 계획경제 국가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장경제 원리와 개인 자본이 체제 유지의 필수 요소가 됐다. 이 기묘한 공존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시장과 국가의 상호 의존

시장은 국가가 제공하지 못하는 물자를 공급하고, 국가는 시장에서 발생한 부를 재분배 또는 흡수한다.

▶돈주의 제도 밖 존재

돈주는 법적으로는 ‘불법 경제 주체’지만, 실질적으로는 체제 운영의 핵심 동력이다.

▶체제 안정 vs. 이념 약화

권력과 자본의 결합은 단기적으로 생존력을 높이지만, 장기적으로 사회주의 통치 이념을 약화하고 내부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5. 권력–돈주의 정경유착 : 공생과 위기의 동시성

평양 시장경제에서 돈주라 불리는 신흥 부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무역회사 등과 결탁해 외화벌이와 유통을 주도하고 있다. 돈주들은 권력기관 간부들과 뇌물을 주고받으며 사업 진입 허가 등 특혜를 받는 등 권력과 경제가 결합한 정경유착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돈주들은 중앙당, 안전원, 보위부, 중앙검찰소 등 권력 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보호받고 있다.

돈주와 권력은 거래 관계를 넘어, 사실상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권력의 입장

외화 부족, 사회간접자본 개발, 주민 불만 완화 등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려면 돈주의 자금과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돈주의 입장

권력의 보호 없이는 공장 임대, 무역 허가, 대규모 건축 사업이 불가능하다.

이 관계는 양날의 검이다. 권력이 시장을 강력하게 단속하면 외화 흐름과 물자 공급망이 붕괴한다. 반대로 돈주가 해외 네트워크를 잃으면 권력 역시 재정·자원 측면에서 심각한 손실을 본다.

6. 돈주의 사회·정치적 의미와 전망

돈주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평양 내부 권력 지형 변동을 이끄는 주체다. 이들은 고급 외제 차, 최신 스마트폰, 주류·사치품 소비를 통해 사회적 위상을 과시하며, 지방과 평양 사이의 격차를 더 벌리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돈주의 자녀 세대는 외국 유학, 고급 교육, 해외 투자 경험을 쌓으며, 기존 북한 엘리트와는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장기적으로 북한 사회 내부에는 이념보다 효율과 이익 중심의 새로운 세대가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평양의 돈주와 권력은 당분간 상호 보완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 제재, 내부 권력투쟁, 시장 확대의 불가역성 등이 맞물릴 경우, 이 균형이 깨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돈주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거나, 외부 투자자와 연계된 새로운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 할 경우, 체제 내부의 긴장은 급격히 고조될 수 있다.

돈주의 부상은 북한 체제가 기존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며, 동시에 향후 체제 변화의 전조가 될 수 있다. 결국 돈주–권력–시장의 삼각 구조가 어떻게 재편되느냐가 북한 미래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다.

평양의 돈주 현상은 단순히 부유층의 등장이라는 사회 현상을 넘어, 국가 권력·자본·시장이 결합하여 만든 북한식 하이브리드 경제 모델의 축소판이다. 이는 북한이 외형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시장화된 생존경제를 제도화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곽인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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