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달러, 북한 장마당의 판을 바꿀 가능성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디지털 달러, 북한 장마당의 판을 바꿀 가능성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의 경제, 정치적 함의

기사승인 2025-09-19 16:42:14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한다.

1. 사회주의와 시장의 공존 – 왜 중요한가?

1990년대 중반의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혹독한 경제 붕괴를 겪으며 국가 배급망이 무너졌다. 생존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했던 주민들은 주저 없이 장마당으로 향했다. 금지와 단속 그리고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도 장마당은 쌀 한 되, 기름 한 병, 신발 한 켤레 나아가 외부 세계로 통하는 스마트폰과 영상 USB까지 오가는 생존의 무대가 됐다.

평양을 비롯한 도시와 시골 곳곳에 뿌리내린 이 장마당은 비공식 경제이자 주민 개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그림자 금융권’이었다. 그러나 거래의 심장은 언제나 불안을 안고 뛰었다.

북한 원화의 끝없는 가치 하락과 화폐개혁 실패는 주민들의 신뢰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중국의 위안화와 미국의 달러였다. 하지만, 이 외화조차 현금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단속원의 시선과 갑작스러운 압수 그리고 도난의 위험은 지폐를 쥔 손을 무겁게 했다.

일부 상인들은 집안 깊숙한 은닉처에 돈을 숨기지만 더 은밀하고 안전한 방법도 존재한다.

바로 신흥 자본가는 전혀 모르는 지방의 ‘충성된 집’에 현금을 장기간 맡기는 것이다. 이 집들은 ‘돈주’의 친척이나 지인이 아니다. 또한 자본가의 신뢰를 얻어서 매달 일정 금액을 받아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맡겨진 현금을 충성스럽게 지킨다. 집수리 명목으로 마당을 파고 깊이 묻는 등 은밀한 방식이 사용된다. 그리고 이런 ‘보관처’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 분산돼 있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이런 제약을 완전히 뛰어넘는 방법이 존재한다면? 스마트폰 속 몇 초의 전송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달러’가 장마당에 도착한다면? 물리적 현금 대신 블록체인 상의 데이터가 안전하고 은밀하게 이동한다면 그리고 이 변화가 장마당을 넘어 북한 사회의 구조와 동북아 금융 질서를 흔든다면?

지금, 북한 장마당에는 ‘보이지 않는 화폐 혁명’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Stable coin)이다.

2. 스테이블코인과 북한 장마당의 변화

● 현금의 역설 : 장마당이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은 북한 경제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국가의 배급망이 붕괴한 뒤에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거래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장마당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초기에는 농민과 노동자가 재배·제작한 물품을 은밀히 교환하는 형태였으나, 2000년대 들어 자유시장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으며 국가가 부분적으로 묵인·관리하는 반공식 경제권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평양을 비롯해 주요 도시와 농촌 장마당에서는 쌀·옥수수·기름 같은 필수 식량뿐 아니라 의약품, 가전제품, 외국산 스마트폰, USB 영상 콘텐츠까지 거래된다. 그러나 북한 원화는 환율 불안정성과 구매력 하락, 화폐개혁 실패로 신뢰를 상실했고, 중국 위안화와 미국 달러가 거래의 표준 통화가 됐다. 

“100달러 지폐 한 장이 집에 있으면 그날 밤, 잠이 오지 않는다.” – 평양 상인 A씨

외화는 가치를 보존하지만, 단속·압수·도난 대상이 되기 쉽고, 가족 간 갈등의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 불안의 일상 : 현금 거래의 위험과 손실

북한 장마당 상인들의 하루는 현금을 지키기 위한 긴장 속에 흐른다. 장사 뒤 귀갓길에 단속원에게 붙잡히면 하루 벌이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어, 속옷·신발 속, 김칫독 같은 은닉처에 돈을 숨기는 것은 일상이다. 

재고 구매를 위해 달러와 위안을 환전하는 과정에서도 변동 환율과 높은 수수료 탓에 손실이 발생한다. 해외에서 돈을 받는 경우, 브로커와 운반책, 경비 등 여러 단계를 거치느라 실제 받는 금액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경우도 흔하다. 이러한 불안과 손실은 현금 의존 구조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 속도와 신뢰의 도입 : 스테이블코인의 잠재력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와 1:1로 연동되는 디지털 자산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빠르고 안전한 거래가 가능하다. 그리고 중간 브로커와 환전 단계를 생략해 속도와 비용,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결제 수단이다.

핵심 장점은 다음과 같다. 결제와 송금이 실시간으로 처리되어 자금 순환이 빨라지고, 상인들은 해외 자금이 도착하자마자 재고 구매 등에 바로 활용해 자금 회전율과 장사 속도,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 국경 간 결제 시 별도의 환전, 복잡한 중개 단계를 없애 비용과 위험을 절감할 수 있다. 전통 송금 대비 수수료도 훨씬 낮은 1% 이내 수준이며, 일부는 1달러 미만까지 절감된다.

블록체인 기반으로 투명성(모든 거래가 공개 원장에 기록됨), 글로벌 호환성(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사용),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거래(스마트 컨트랙트 활용) 등의 특성을 가진다. 현금이나 카드 결제가 불가능했던 환경이나 은행 접근성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전자지갑만으로 디지털 금융 참여가 가능해진다. 해외 공급처와 직접 결제 가능해 희망 품목 다양화 및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

▶일상적 실이익 예시는 다음과 같다. 해외에서 받은 자금이 곧바로 전자지갑에 도착, 이 자금을 재고 구매에 즉시 활용 → 자금 회전율 및 이윤 상승

▶수출입 기업도 수수료와 환율 변동 부담 없이 다양한 국가에서 실시간 정산 및 대금 결제 가능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과 각국 정부, 투자자들이 결제 혁신 및 디지털 경제 인프라 변화의 중심축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주목하고 있다.

● 이해관계자들의 계산법

▶ 북한 당국의 통제 전략과 한계

북한 당국은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을 외환 유출과 금융 통제 체제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다. 디지털 자산이 통제 밖에서 국경을 넘어 유통되면 체제 유지에 필요한 재정·금융 관리력이 약화한다고 판단한다. 이에 블록체인 접속 차단, 전자지갑 앱 탐지·제거, 거래 기록 추적 강화 등 기술적·제도적 통제책을 병행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휴대폰과 USB 단속처럼 물리적 단속은 강력할 수 있지만, 블록체인 거래의 익명성과 탈중개성으로 인해 완전한 차단은 어려울 것이라는 한계도 안고 있다. 당국의 기본 입장은 외화 흐름을 철저히 관리해 국가 안정을 지키는 것이다.

▶ 국제사회의 기회와 우려

국제사회는 북한의 디지털 결제 확산을 두고 긍정과 부정 양면을 본다. 긍정적으로는 인도적 지원금이 빠르고 투명하게 전달돼 주민 생활 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반면 부정적으로는 국제 제재를 우회하는 통로, 불법 자금 세탁과 밀수 등 범죄 활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런 이유로 유엔, 미국 등은 디지털 자산 관련 거래를 추적·감시하고 차단할 수 있는 국제 공조와 기술적 대응을 강화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 중국의 상황별 유연 대응

중국은 북한과의 접경 지역 거래·송금에 대해 유연하면서도 선택적인 대응을 할 가능성이 높다. 가족 간 소액 송금 등 인도적·생활적 필요성이 인정될 때는 사실상 묵인하지만, 대규모 거래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는 단속과 통제를 강화할 수 있다. 접경 지역 경제와 인적 네트워크의 특성을 반영해, 실질적 이익과 위험을 균형 있게 조율하는 전략을 쓸 것으로 전망된다.

● 다가올 장면 : 2028년 디지털 장마당

아침 6시, 평양 장마당의 한 상인은 단둥에 있는 형부로부터 300 USDT를 전송받는다. 소요 시간은 18초. 현금을 숨기거나 환전상의 수수료를 감수할 필요 없이 중국 도매상에 식용유와 라면을 주문한다. 점심 전 화물차가 도착해 진열대가 채워지고 장사는 활기를 띤다. 

한편, 국경경비대는 블록체인 모니터링 프로그램으로 이 거래를 포착한다. 하지만 익명 지갑 주소 벽 앞에서 추적이 멈춘다. 장마당은 현금에서 데이터로, 은닉에서 개방으로 변모해 간다.

3. 장마당에서 시작되는 미래, 한반도를 흔들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새로운 결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북한 장마당이라는 제한된 경제권 안에서 시간과 비용 그리고 위험이라는 세 겹의 벽을 단숨에 허무는 ‘속도와 신뢰의 도구’다. 보이지 않는 데이터 형태의 돈은 더 이상 단속원에게 압수당하지 않는다. 또한 국경의 물리적 장벽을 몇 초 만에 뛰어넘는다. 이는 평양의 한 상인에게는 장사 속도를 두 배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무기이다. 그리고 국경 밖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이를 실시간으로 돕는 다리이며 외부 세계를 향한 작은 창이 된다.

그러나 모든 혁신이 그렇듯 이 변화는 양날의 검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주민에게는 안전과 효율을, 정권에는 통제 약화의 공포를, 국제사회에는 인도적 지원의 기회이자 제재 무력화의 위협을 안긴다. 북한 당국은 이를 막으려 기술과 정책을 동원하겠지만 완전한 차단은 어려울 것이다. 이는 곧 해방과 통제 그리고 개방과 차단이 맞붙는 새로운 전장이다.

미래를 내다보면, 장마당의 디지털화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 고리를 넓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북한 사회는 조심스럽게 변화한다. 그리고 동북아 금융 질서와 대북 정책도 이에 맞춰 재편될 수밖에 없다. 이 흐름이 장기화한다면 그것은 단지 ‘장마당 안의 거래 혁신’이 아닌 한반도의 권력 구조와 국제 관계까지 흔드는 조용한 혁명이 될 것이다.

오늘 장마당 상인의 손끝에서 시작된 디지털 송금이 내일은 북한 전역과 국경을 넘어 흐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폐쇄된 사회에 점진적이지만 거스를 수 없는 개방을 불러올 수 있다.

그날 장마당은 더 이상 북한 내부만의 시장이 아니라, 세계와 호흡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한 노드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곽인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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