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와 시장의 공존 실험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사회주의 국가와 시장의 공존 실험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중국 ‘시장사회주의’, 베트남 ‘도이모이’, 북한 ‘하이브리드 생존경제’

기사승인 2025-09-12 13:00:04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한다.

1. 사회주의와 시장의 공존 – 왜 중요한가?

오랫동안 사회주의 국가들은 시장을 자본주의의 잔재이자 체제를 흔드는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생산과 분배는 국가가 관리하고, 이윤 추구는 억제하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확산했다. 따라서 경제 위기가 겹쳐 배급은 끊기고 공장도 멈추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서야 ‘시장’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각 나라가 처한 역사와 정치 환경에 맞춘 ‘전략적 타협’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북한은 비슷한 위기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중국은 ‘전통 사회주의 틀’ 안에서 시장 개혁을 추진해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 베트남은 과감한 개혁·개방으로 1990년대 이후 연평균 6~7% 성장과 빈곤율 급감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반면, 북한은 체제 안정을 최우선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시장을 제한적으로만 활용하는 독특한 ‘하이브리드 생존경제’ 모델을 운영했다. 이 세 모델의 비교는 북한이 처한 딜레마와 선택지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2. 중국의 “시장 사회주의”와 베트남의 “도이모이(쇄신)”

중국은 1978년 개혁 개방을 시작하였는데 일당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시장 메커니즘을 단계적으로 도입했다. 특별 경제구역을 만들고, 민간과 외국 자본을 받아들이며 국유기업도 개혁을 통하여 빠른 경제성장과 정치적 통제를 동시에 달성했다. 하지만 부의 불평등과 국가자본 집중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은 시장을 ‘체제를 흔드는 위기’가 아닌, 오히려 ‘발전의 도구’로 활용한 셈이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라는 급진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중앙계획을 과감히 축소하고 사유재산과 민간 기업을 허용했다. 또한 농업 생산도 자유화하고 외국인 투자도 적극 유치했다. 베트남은 WTO, ASEAN 가입으로 국제무대에 진입하며 수출 주도형 경제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는 일당 체제를 유지했지만, 경제는 국제 기준에 맞는 개방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3. 북한 : 하이브리드식 생존경제의 구조와 한계

● 북한의 하이브리드 생존경제란?


하이브리드 생존경제란 북한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자생적으로 형성한 비공식 시장(장마당)을 국가가 부분적으로는 허용하면서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을 유지하는 이중 구조를 말한다. 즉, 국가가 통제하는 공식 경제와 주민들이 실생활에서 운영하는 비공식 시장이 혼재된 상태이다. 이것은 체제 안전과 주민 생존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북한만의 독특한 모델이다.

북한의 시장 도입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불가피하게 시작됐다. 국가 배급 체계가 붕괴하자 주민들은 장마당과 비공식 거래에 의존하게 되었고, 북한 당국은 이를 부분적으로 용인해 계획경제의 근간은 유지하면서 시장의 일부 기능만 인정했다. 

생산물 시장만 제한적으로 공식화됐으며, 자본·노동·토지 시장은 거의 비공식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이 하이브리드 경제는 체제 전환이나 혁신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과 통제라는 당면 과제에 초점을 두기에 경제 역동성과 체제의 제도화 수준이 낮고, 장기 성장에도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 북한은 시장 제도와 통화 환경에서 모두 불안정성이 크다. 최근엔 미국 국채 기반 스테이블코인 등 디지털 자산의 유입 가능성까지 더해지면서 시장 통제 딜레마가 심화하고 있다.

4. 북한의 선택과 디지털 금융 시대의 도전

중국은 ‘성장과 통제’를, 베트남은 ‘개방과 체제 유지’를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북한은 계획경제와 비공식 시장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생존경제’로 버티고 있다. 

그런데 최근 ‘달러 연동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가치가 안정적이고 국제 결제가 빠르며 익명성까지 갖춘 이 디지털 자산은 북한 장마당과 해외 송금 조직에 매력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예컨대 과거에는 미국 달러 지폐를 물리적으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블록체인 기반 전자화폐로 신속하게 해외 자금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외화 조달과 재화 유통이 쉬워지는 한편, 국가의 외환 통제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시장화는

▶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압력
▶ 체제 보존 중심의 정치 전략
▶ 디지털 금융의 확산

이 세 힘이 만드는 미묘한 균형 속에서 방향이 결정될 것이다. 만약 이 균형이 무너지면 북한 시장화는 단순한 생존 도구를 넘어 체제 변화를 촉발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지금 북한이 걷는 길은 과거보다 훨씬 가늘고 미끄러운 외줄 위에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디지털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곽인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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