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4.5일제 실시하여 노동시간 단축하라!”
26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일대. 붉은 머리띠를 두른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 조합원들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응원단장의 선창에 맞춰 “노동시간 단축하여 저출생 해결하자”, “인력 부족 못 살겠다, 정년채용 확대하라” 등 외침을 이어갔다. 대형 플래카드에는 ‘실질임금 인상! 내일을 바꿀 주 4.5일제!’ 문구가 선명했다.
3년 만에 열리는 총파업의 열기가 뜨거웠지만, 집회 현장 규모는 노조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금융노조는 당초 8만여 명의 참여를 예상했으나, 파업의 주축이 되어야 할 시중은행 노조원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사실상 ‘찻잔 속 태풍’에 그쳤다.

지도부의 절박한 호소 “탐욕 아닌 생존의 외침”
이날 단상에 오른 김형선 금융노조 위원장은 파업의 정당성을 역사적 투쟁에 빗대어 호소했다. 김 위원장은 “2002년 우리 금융노조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주 5일제를 쟁취했듯, 오늘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모였다”며 “주 4.5일제는 저출생, 지방 소멸 같은 복합 위기를 돌파할 해법이자 우리 아이들에게 축제 같은 세상을 만들어주자는 약속”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억대 연봉 은행원의 탐욕’이라는 비판도 정면 반박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5년간 시중은행 점포 765개가 폐쇄되고 7000명의 직원이 감원됐다”며 “고객의 불편을 외면하고 역대급 이익을 창출하는 사측과 번아웃에 고통받는 조합원을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해보자는 우리 중 누가 탐욕이냐”고 반문했다.
이어 연단에 오른 유기섭 한국노총 사무총장이 강력한 연대의 뜻을 밝혔다. 특히 유 사무총장은 “지난 9월10일 노동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장관이 ‘주 4.5일제는 당연히 가야 할 길이며 노사가 자율적으로 교섭하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고 전하면서 “금융노조가 선도했던 주 5일제가 대한민국 삶을 바꿨듯, 오늘의 주 4.5일제 투쟁 역시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도부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중은행의 반응은 냉담했다. 5대 시중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파업 참여 인원은 △KB국민은행 100명 미만 △우리은행 약 100명 △하나은행 약 50명 △NH농협은행 약 50명 수준에 그쳤다. 대부분 본점 부서 분회장, 노조 간부 위주로만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한은행의 경우, 노동조합 소속 직원들만 일부 참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 위원장이 소속된 IBK기업은행은 1477명(전 직원의 15.7%)으로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 국책은행으로서 시중은행과 상황이 다른 점도 일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사전 안내와 비노조 인력 배치 등을 통해 고객 불편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황제 파업’ 비판 속 공감대 형성 실패
3년 만의 총파업이 동력을 잃은 가장 큰 원인으로는 내·외부의 공감대 부족이 꼽힌다. 파업 명분이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다.
특히 ‘황제 파업’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셌다. 올해 상반기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 임직원이 수령한 평균 급여액은 6350만원에 달한다. 지난해 상반기(6050만원) 대비 4.96%(300만원) 늘었다. 월급 1000만원 수준을 넘어 연봉으로 단순 환산하면 1억3000만원 규모다. 이같이 ‘억대 연봉’으로 통칭되는 고임금 직군이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자, 경기 침체 분위기 속 국민 정서와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싸늘한 여론은 노조 내부로까지 확산하며 참여를 주저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됐다.노조는 주 4.5일제 전면 도입과 임금 5%(3.9%로 수정 제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앞서 3월 ‘2025년 산별중앙교섭 요구안’ 제출 이후 노동자 측과 사측은 35차례 교섭을 이어갔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권 사이에서도 파업의 실익에 대한 회의론이 번진 것으로 보인다.
금융노조는 이날 집회를 마친 뒤 대통령실 인근까지 행진하며 투쟁 의지를 다진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동력을 상실한 만큼 향후 교섭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이번 파업은 명분과 실리 모두 잃었다고 본다”며 “현장 직원들의 공감도 얻지 못하는 주장을 계속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안을 가지고 대화에 임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