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2030년까지 신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환자를 2023년 대비 50% 감소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가운데 HIV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깊게 뿌리박힌 사회적 낙인을 해소하기 위한 적극적인 인식 개선 활동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레드(RED) 마침표 협의체는 1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한에이즈학회와 함께 ‘HIV 차별 종식을 위한 레드 마침표 캠페인’ 출범을 알리는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HIV 차별 종식 필요성을 강조했다.
HIV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을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다. HIV가 몸속에 침입해 면역 기능을 떨어뜨려 감염인의 면역세포(CD4+T세포) 수가 200/㎕ 미만이 되면 에이즈로 진행된다. HIV 팩트시트에 따르면 2024년 국내에서 새롭게 신고된 HIV 감염인은 975명으로 전년(1005명) 대비 30명(3.0%) 감소했다. 같은 해 기준 생존 HIV 감염인은 1만7015명으로 2023년(1만6459명) 대비 556명(3.4%) 증가했다.
HIV는 더 이상 치료 불가능한 공포의 병이 아니다. 1980년대 HIV/AIDS 환자의 진단 후 기대 여명은 약 1~2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7년 최초의 HIV 치료제 승인 후 지난 40년간 HIV 치료 환경과 성과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과거에는 HIV 치료를 위해 하루에 수십 개의 항바이러스제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칵테일 치료’ 방식이 활용됐다. 이후 1일 1회 복용하는 단일 정제의 경구요법이 등장하는 등 치료 방식이 간편해졌다.
정부의 HIV 환자 지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1월부터 HIV 신규 감염 예방을 목적으로 감염 취약군에 대해 △HIV 항원·항체 검사 급여 본인부담금 전액 지원 △PrEP(프렙, 노출 전 예방요법) 약값 본인부담금 중 본인 부담 6만원 제외한 나머지 약값 지원 △PrEP 처방 전 검사(B형간염 항원·항체, C형간염 항체, 신기능 검사) 급여 본인부담금 전액 지원 등을 발표했다.
HIV에 대한 치료와 예방 환경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사회적 편견과 낙인은 여전하다. ‘포옹, 악수, 식사, 대화만으로도 감염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차별을 받기 일쑤다. 문화적·사회적으로도 배제된다. 취업은 물론 일자리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2023년 HIV 감염 진단을 받은 119 소방대원이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해 소송이 이어지기도 했다.
질병청과 대한에이즈예방협회가 실시한 인식조사 결과, 5점 만점 중 ‘HIV 감염인과 식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문항의 평균 점수는 3.55점으로 조사됐다. 이어 ‘HIV 감염인과 같은 직장에 다닐 경우 회사에서 감염인을 해소시키길 원한다’는 문항은 2.83점, ‘같은 병원의 같은 층에 감염인 환자가 입원해 있다면 해당 병동에 입원하지 않겠다’는 문항은 3.21점으로 나타났다.
HIV 감염인은 병원 내에서도 차별을 경험한다. 지난 2022년 5월 정형외과 수술을 받기로 했던 병원에서 수술 전 HIV 양성이 확인됐다는 이유로 수술을 거부당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환자 사례도 있다. HIV 감염인에게 병원은 불편한 장소다. 감염인 799명 중 47%는 병원을 우호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인식했으며, 타 진료과와 협진 중 하나 이상의 불편함을 경험한 환자 비율은 63%에 달했다.

HIV 감염인은 사회적 차별로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작년 국내 HIV 감염인 단체 ‘러브포원’이 HIV 감염인 16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73%가 ‘치료제 복용 시 주변 사람들이 HIV 감염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렵다’고 답했다. 51%는 ‘HIV 치료제를 복용할 때마다 감염 사실이 떠올라 우울감이나 불편함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사회적 차별은 부족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다. 비영리법인 ‘신나는센터’가 지난 5월14~27일 한국리서치와 함께 만 20~69세 국민 3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82%가 HIV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나, HIV와 AIDS를 구분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인지도를 보이는 응답자는 25%에 불과했다. 다만 HIV의 인식 개선 필요성에 대한 공감도는 높았다. 응답자 80%는 ‘한국 사회의 HIV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특히 응답자 81%는 HIV 감염 감소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진범식 국립중앙의료원 감염내과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우리 사회 구성원 스스로가 HIV에 대한 개방적·포용적 태도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HIV는 더 이상 치명적인 질환이 아니라 만성질환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조기 진단과 치료만 이뤄지면 비감염인과 기대수명이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진 교수는 “감염인에 대한 차별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의료 현장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감염 예방 조치를 숙지하고 있다면 수술 과정에서의 위험은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며 “PrEP에 대한 접근성과 홍보를 강화하고, 예방적 치료에 대해서도 건강보험 적용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승환 신나는센터 상임이사도 “이번 레드 마침표 캠페인을 통해 HIV 감염인들이 차별과 편견 없이 치료받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 전반의 연대와 지지가 더욱 확산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