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갤러리 811에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누드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 작품은 실물 크기로 전통적인 누드와 달리 대담한 포즈로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한 살아있는 여인과 대면하는 듯했다.
쿠르베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성공을 즐겼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오만한 남자”라고 선언하는 자화상을 그리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쿠르베는 자신이 인정한 것보다, 그리고 비평가들이 평가한 것보다 훨씬 더 전통에 얽매인 화가였다. 그의 누드 작품들은 대체로 모델 습작 수준을 넘지 못하며, <앵무새를 든 여인>처럼 예술적 분위기를 더하려 할 경우 오히려 통속적인 살롱 그림처럼 인공적인 느낌으로 변질되곤 했다.
그는 사실주의를 내세우며 건장한 체격의 모델을 즐겨 그렸고, 그 대표적인 예가 1853년에 발표한 <목욕하는 여인>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대중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고, 실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흥미로운 점은 이 누드가 당시의 미술계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인체 비례 기준과는 크게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미술학교에서 인체를 습작하는 아카데미즘의 분위기까지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비판을 감안하더라도 쿠르베는 누드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일종의 영웅처럼 기억되고 있다. 쿠르베는 말로 설명하면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림으로 보면 완전히 다르다. 그의 사실주의는 그냥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강한 욕망이 그대로 터져 나온다. “이게 손으로 만질 수 있을까?”라는 기준으로 현실감을 따지는 사람들한테 쿠르베는 사실주의의 끝판 왕이었다.
“쿠르베는 최고의 사실주의자이다. 움켜잡고 탁 때리며, 쥐어짜거나 먹으려는 그 자신의 충동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팔레트 나이프의 자국자국마다 그 충동이 전달되어 있다. 그의 눈길은, 사슴을 애무하고 사과를 움켜잡거나 커다란 송어 옆구리를 찰싹 때릴 때와 똑같은 열정으로 여체를 포옹하고 있다.
이러한 철저한 관능성은 일종의 동물적 장엄성을 띠게 된다. (중략) 살의 견고한 무게는, 확실히 우아함보다는 현실적이고 영속적이다.”라고 케네스 클라크는 평하고 있다.
1850 년대와 1860년대 쿠르베의 여성 누드 그림에는 알레고리, 여신, 오달리스크 등 전통적인 묘사에서 볼 수 있는 이상화보다는 살아있는 여성의 신체 디테일인 몸매나 머리 혹은 결혼 반지로 실제 모델임을 드러낸다. 쿠르베는 가식적이거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여성 누드에 맞서고 싶어했고, 이 솔직함은 파리 관람객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19세기 미술계의 반항아, 귀스타브 쿠르베는 1866년 살롱에 <앵무새를 든 여인>을 출품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답지 않게 당시 유행하던 알렉산더 카바넬 스타일의 낭만적인 누드에 가까웠다. 평소 사실적인 누드를 그리며 낭만주의에 도전하던 쿠르베에게는 꽤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쿠르베도 인간인지라 나폴레옹 3세가 <비너스의 탄생>을 개인 소장용으로 구입하고, 자신의 <목욕하는 여인>을 승마용 회초리로 내리쳤을 때 깊은 상처를 받았을 터이다. 아무리 대담한 쿠르베도 혁신적인 시도를 하며 평론가와 대중의 비난을 사는 일이 힘들고 지쳐 팔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오르세에 있는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1889)의 <비너스의 탄생>은 첫 번째 버전으로 1863년 살롱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이 살롱은 많은 누드로 인해 ‘비너스의 살롱’이라고 불렸다. 1875년 뉴욕의 존 울프(John Wolfe)는 카바넬에게 약간 더 작은 복제품을 주문하였다. 이 구성은 우아한 모델링, 실크 같은 붓놀림, 완벽한 형태로 아카데미즘 예술의 이상을 구현하였다.
존 울프는 이 작품을 20여년간 소장하다가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중세, 근 현대 작품 200만 점이 넘는 물량을 소장하고 있다. 하루에 4시간씩 관람을 한다 해도 16년을 봐야 할 만큼 대규모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작품들의 80%가 기증되었다.

1866년 살롱에서 쿠르베가 <앵무새를 든 여인>을 발표했을 때, 그 작품은 마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마네는 그 영향으로 화가이자 모델인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을 그리게 되었다. 그후 1868년 살롱에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을 출품하였다.


오른손으로 제비꽃 향을 맡는 뫼랑은, 왼손에는 외알 안경을 들고 있다. 얼마 전 뫼랑은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에서 뻔뻔스러운 누드로 분장한 적이 있었다. 두 작품에 대한 격렬한 혹평으로 상처를 입은 마네는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외엔 더 이상 누드를 그리지 않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비교적 수수한 모습으로 실내에서 편안한 실크 가운을 입고 있다.

‘새와 함께 있는 여인’이라는 모티브는 기존의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에 반기를 든 쿠르베가 시작하여, 새로운 기치를 내건 쿠르베를 존경하는 마네와 드가가 이어서 그렸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쿠르베의 <앵무새를 든 여인>에 대한 일종의 반박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요즘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좀 다르게 바라본다. 단순한 풍자나 반론이 아니라, 인간의 오감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제비꽃 향기를 맡는 코는 후각을, 껍질이 벗겨진 오렌지는 미각을, 앵무새는 청각을, 그리고 모델이 만지고 있는 남성의 외알 안경은 시각과 촉각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드가 역시 쿠르베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테라스에 있는 여인>이라는 스케치를 그렸다’라고 설명하는데 이 그림은 찾을 수가 없었다. ‘푸른 베일을 두른 어린 소녀의 모습에 새들이 함께 등장하는 스케치’라 한다.
2023년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마네와 드가 전시에서는 마네의 <제비꽃을 든 베르트 모리조>와 함께 드가의 <따오기와 함께 있는 여인>이 미술관 전면을 장식했다.
드가는 1857년에서1858년까지 로마에 머무는 동안 이 작품의 초기 스케치를 노트에 남겼는데, 처음엔 사색에 잠긴 여인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1860~1862년경 이 구상은 훨씬 더 환상적인 분위기로 발전했다. 가상의 중동 도시, 분홍색 꽃, 붉은 따오기 두 마리가 등장하면서 작품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드가는 또 다른 대형 역사화인 <세미라미스의 바빌론 건축>(1861)을 구상하면서도 화려한 새들을 넣는 아이디어로 고심을 했다. 드가가 작품에 새를 등장시키려 했다는 건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과 상징성을 통해 역사적인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하고 싶었다. 특히 붉은 따오기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2023년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와 드가의 작품을 보고, 쿠르베의 <앵무새를 든 여인>을 보고 싶었다. 이제 우리는 쿠르베, 마네 그리고 드가의 ‘새와 함께 있는 여인’이란 주제로 그린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해 보았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위대한 선배에게 영감을 받지만, 여기에는 분명 다양한 예술적인 변주가 존재한다.
화가들은 평범한 일상과 사물을 화폭에 고정시켜 의미를 부여하고 관람자들에게 특별한 양상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 작품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지평을 넓히게 된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나를 나타내는 취향이 되고 품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