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는 ‘메이드 인(Made in) 심언경’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메이드 인(Made 人)’입니다. K팝, K드라마…낱개의 카테고리가 무용할 만큼 K콘텐츠의 글로벌 영향력이 커진 지금, 그 현상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묵묵히 K콘텐츠를 무대 위로 올려놓는 제작자들을 만납니다. <편집자 주>
노을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 김재중 ‘여리고 여린 사랑을’, 김준수 ‘너를 쓴다’, 켄 ‘바람이 불어와요’. 이 곡들의 공통점은 뛰어난 가창력을 요하는 서정적 발라드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히트곡 메이커 프로듀싱팀 빅가이로빈(bigguyrobin, 최석환·서충희·김병완·이보현·유예솔)이 작업했다는 것이다.
“원래 발라드를 좋아해요. 국내 오리지널리티가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정서상 미국 힙합이 한국 힙합보다 더 멋져 보이는 것처럼요.” 최근 서울 가산동 쿠키뉴스 사옥에서 만난 빅가이로빈 수장 최석환(32)은 이같이 밝히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발라드의 ‘멋’을 역설했다.
최석환에게 발라드가 유독 매력적인 이유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직접 연주하는 사운드와 제일 가까워요. 사람의 터치가 제일 많이 들어갔다는 뜻이에요. 아이돌 음악은 화려하지만 한 명이 만들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발라드는 사람들이 없으면 못 만들어요. 혼자 만들면 만들 수 있겠지만, 가상 악기로는 정말 아쉬운 사운드가 나오거든요.”
빅가이로빈의 출발점은 루나 ‘원하기 전에’였다. SM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를 통해 데뷔곡을 낸 만큼 기대도 컸단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인생이 풀렸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정확히 1년 동안 일이 안 들어왔어요. 그때 처음 내가 결국 뛰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CD를 구워서 엔터테인먼트 문도 두들겨 봤어요. 메일은 당연하고요.”
이처럼 길진 않지만, 예상치 못한 공백기는 이후 그가 작곡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꿔놨다. “다들 예술을 하고 싶어 하죠. 등따시고 배부르면 예술이 안 나온다고들 하고요. 물론 음악이 바뀔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작업실에서 혼자 예술을 하는데 누가 날 알아줄 일은 절대 없어요.”
최석환에게는 작곡·작사뿐만 아니라 판매까지가 음악이다.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작업물이 소비될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전언이다. 이는 작곡가의 필수 역량과도 연결된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멜로디를 특출나게 잘 떠올리는 분들이 계세요. 냈다 하면 히트 치죠. 사실 내 예술을 버리기가 진짜 힘들어요. 그래도 버려야 해요. 내가 좋아도 사람들이 안 좋아한다면 인정해야 해요. 이것도 능력이에요. 그렇지 못하면 제자리에서 뱅뱅 돌다가 끝나거든요.”

대표곡인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빅가이로빈은 당시 기쁨을 누리면서도 현실적인 감각을 놓지 않았단다. “성적이 너무 좋았죠. 15만명이 들은 노래니까요. 9위로 시작했다가 몇 시간 안에 1위에 꽂혔어요. 그리고 제일 처음 팀에서 멜로디 쓴 친구한테 전화해서 신난다고 어디 자랑하지 말라고 했어요.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누르려고 했던 기억이 나요.”
히트곡을 또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을까. 최석환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데”라면서도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성적이 안 나오면 가수와의 이해관계가 틀어질 수 있어요. 감사하게도 그렇게 등돌리신 분은 없지만요. 누구의 탓은 아니에요. 그때 트렌드부터 발매일 날씨까지 다 영향을 미쳐요. 성적이 안 나왔던 가수와 다시 할 기회가 반드시 오거든요. 그때가 가장 부담이 커요. 이번에는 안되면 진짜 끝이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결국 음악을 납품하는 입장이니까 예술적으로만 보기 힘든 거죠.”
2023년 상반기부터 음반 제작에 집중해온 최석환은 현재 트윗 엔터테인먼트, 트윗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직업인 작곡가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음반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예술성을 놓지 않으면서도 실현 가능성을 중요시하는 그다운 선택이었다.
“내 곡을 사가서 발매하고 히트하는 게 삶의 의미인 분들이 있고요. 저도 그랬지만 이제 그 시기를 지난 것 같아요. 예컨대 곡이 수록된 앨범 재킷에 브라운이 어울려요. 그런데 실제 음반은 라이트 그린으로 나오는 거죠. 완벽한 내 예술이라는 느낌이 없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염증을 느끼기도 했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