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발 범용 제품의 공급 과잉 등 여파로 석유화학업계가 기나긴 보릿고개를 넘는 가운데, 주요 기업들이 설비 매각은 물론 임원 연봉 반납, 명예퇴직 등 고강도 자구책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대규모 구조조정 등 체질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조기 대선 체제에 놓여 사실상 다음 정부 구축까지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11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연결기준 적자를 기록한 SK이노베이션은 계열 사장단을 중심으로 연봉의 30%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7일 박상규 SK이노베이션 사장이 계열 전체 구성원에게 이메일 레터를 보내 어려운 업황을 강조하며 “저를 비롯한 리더들이 생존부등식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갖고 답을 찾아나가겠다”고 밝혔는데, 이에 따른 솔선수범의 차원으로 해석된다.
SK이노베이션 계열 임원들의 출근 시간도 오전 7시로 앞당겨졌으며, SK온에서 시행 중인 ‘임원 해외 출장 이코노미석 탑승 의무’ 정책을 전체 계열사로 확대하고 임원 주6일제 근무도 지속하기로 했다.
박상규 사장은 이메일 레터를 통해 “현재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적 불황, 전기차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정체) 장기화, 미·중 갈등 심화, 관세전쟁 등 퍼펙트 스톰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며 “SK이노베이션 계열 모든 리더와 구성원이 힘을 한데 모아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가오는 전기화 시대, 새로운 미래 에너지 시대를 준비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SK이노베이션은 1분기 영업손실 446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영업이익 6247억원) 대비 크게 적자 전환했다.
이러한 고강도 자구책은 비단 SK이노베이션만의 일이 아니다. 비주력 사업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 LG화학은 여수공장의 직원 사택 일부를 매각하며 효율화에 나섰다. LG화학 여수공장 측은 최근 내부 공지를 통해 “장기 비유동 자산의 효율화와 비용 집행의 합리적 차원에서 향후 사택을 점진적으로 폐지·매각하고 (소호·도원·안산 사택 중) 안산 사택만 남겨 기숙사 형태로 운영하는 계획을 수립하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LG화학은 최근 사모펀드(PEF) 글랜우드프라이빗에쿼티와 바닷물 담수화 등 수처리 필터를 만드는 워터솔루션 부문 매각 협상을 진행 중이며, 매각 규모는 약 1조원대로 알려져 있다. 또, 이차전지소재 분리막 사업 악화에 따라 올해 충북 청주 분리막 공장 저속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는 등 다방면에서 체질 개선을 위한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이밖에 롯데케미칼 역시 최근 울산공장의 장기근속자와 정년퇴직을 앞둔 생산직 직원을 중심으로 권고사직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권고사직은 롯데케미칼이 임원 구조조정을 제외하면 사실상 처음으로 인력 감축에 나선 사례다. 범용 설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롯데케미칼은 인력 구조조정 외에도 지난해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법인을 청산하고, 올 초 일본 레조낙 지분 4.9%를 2750억원에, 지난달 파키스탄 법인을 979억원에 각각 매각하며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석화업계가 이처럼 전례 없는 고강도 자구책을 실시하는 것은 약 4년째 이어지는 불황에 따른 ‘최후의 카드’ 성격이다. 장기 불황에 따라 전반적인 구조조정 및 체질 개선 작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워낙 규모가 커 한계가 있는 데다, 최근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따른 부담으로 한동안 긍정적인 전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S&P글로벌레이팅스(이하 S&P)는 ‘더 깊은 하락 사이클에 직면한 한국 석유 화학 기업들’ 보고서를 통해 2022년 말 시작한 한국 석화업계의 하락 사이클이 올해도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S&P는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에 따른 수익성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과 더불어 중동 지역의 공격적인 설비 투자가 공급 과잉에 일조할 것”이라며 “(관세 등) 글로벌 교역 환경의 불확실성은 화학제품에 대한 수요 위축을 심화시켜 설비 가동률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추가적인 위험 요인”이라고 짚었다.
이어 “비용 절감 등을 통해 기업들의 수익성이 일시적으로 반등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여전히 ‘중간 사이클’ 수준을 크게 밑돌 것”이라며 “이번 하락 국면은 향후 2년 내 벗어나기에는 너무 깊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업계는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구조조정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정부는 타 업종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나아가 지난해 말 발표된 ‘석유화학업계 지원 방안’에 이어 상반기 중 후속 지원 방안이 발표될 예정이나, 오는 6월3일 대선 일정과 맞물려 정책 추진 동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석화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업·협회 등과 주기적으로 대화를 이어오며 업계 회생 지원의 의지를 나타냈지만, 업황과 동시에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이른 시일 내 추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며 “그동안 석화업계는 사실상 버티기에 급급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