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빅파마들이 중국 시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신약 개발 파트너로 중국 기업을 택하는가 하면 기술 제휴를 잇달아 체결하며 협력의 물꼬를 트고 있다.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중국과의 접점을 늘리며 시장 공략에 뛰어드는 모습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빅파마들이 중국 기업과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술 이전 및 공동 개발 계약을 연이어 체결하면서 신약 개발 분야에서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시장조사업체인 ‘글로벌 데이터’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중국 바이오 기업들의 해외 기술 이전 거래 총액은 약 415억달러(한화 약 57조원)에 이른다.
미국 화이자는 지난달 중국 바이오 기업 ‘쓰리에스바이오’(3SBio)와 항암 신약 후보물질인 ‘SSGJ-707’의 개발·제조·상용화를 위한 글로벌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SSGJ-707은 쓰리에스바이오가 발굴한 이중항체 후보물질로, 면역관문 PD-1과 VEGF(혈관내피세포성장인자)를 표적으로 한 비소세포폐암, 전이성 대장암, 부인과 종양 치료제다. 올해 중국에서 첫 번째 3상 임상시험을 시작할 예정이다. SSGJ-707은 지난 임상에서 유의미한 초기 효능과 안전성을 보였다.
화이자는 향후 SSGJ-707의 원료의약품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완제의약품은 미국 캔자스주 맥퍼슨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이번 계약은 선급금 12억5000만달러(약 1조7000억원)를 포함해 최대 60억달러(약 8조2500억원) 규모다.
미국 애브비의 경우 중국 심시어 파마슈티컬 그룹의 자회사인 ‘심시어 자이밍’(Simcere Zaiming)과 지난 1월 다발성골수종 신약 후보물질 ‘SIM0500’의 개발을 위한 라이선스 계약을 최대 10억5000만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로 체결했다. SIM0500은 심시어 자이밍이 보유한 T세포 관여자 다중특이성 항체 기술 플랫폼을 적용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재발성·불응성 다발성골수종(RRMM) 치료제로, 다발성골수종 세포들에 대응해 강력한 T세포 독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입증됐다.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채택해 경쟁력 높은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이 전략은 이미 알려진 약의 효능과 안전성을 개선하는 방식의 개발법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 빠른 속도로 개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단순 제네릭(복제의약품) 개발에 그치지 않고 이중항체나 항체·약물접합체(ADC) 항암제 등 혁신 신약 개발에 선도적으로 나서 기술 선점을 이뤘다.
중국 정부는 산업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은 최근 핵심·희귀의약품 임상시험 신청 검토 기간을 60일에서 30일로 단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과 유사한 속도의 의약품 심사 체계를 갖추게 됐다.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약진은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해 11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중국 제약사의 신약 후보물질은 총 4391건으로 2021년(2251건) 대비 약 95% 증가했다. 이는 전 세계 신약 파이프라인의 31%에 해당하는 규모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엔 ‘중국산 신약’에 대한 의구심이 컸지만, 최근 다국적 제약사들이 기술 수입을 넘어 공동 개발 등으로 협력 수준을 높이면서 중국 바이오 기업에 대한 글로벌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졌다”며 “중국 시장을 단순 수출 시장이 아니라, 공동 개발과 기술 교류가 가능한 전략적 허브로 보는 시각이 커졌다”고 전했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대웅제약은 칼륨 경쟁적 위산 분비 억제제(P-CAB) 계열 위식도역류질환 신약인 ‘펙수클루’(성분명 펙수프라잔)와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의 중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중국은 4조원 규모에 달하는 세계 최대 소화성 궤양용제 시장으로 꼽힌다.
한올바이오파마는 중증근무력증 적응증을 보유한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바토클리맙’(IMVT-1401/HL161)의 중국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바토클리맙은 2017년 중국 하버바이오메드에 기술 수출됐지만, 한올바이오파마가 지난 3월 계약 해지를 통보한 상태다. 현재 국제상업회의소(ICC)에서 중재가 진행 중이다.
JW중외제약이 자사 기술로 합성·제조한 항생제 원료 ‘에르타페넴’을 사용한 완제품은 최근 중국 NMPA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았다. 이 제품은 JW중외제약이 시화공장에서 생산한 원료를 인도 파트너사인 ‘그랜드 파마’에 공급하고, 그랜드 파마가 완제품으로 제조한 항생제다. 에르타페넴은 페니실린, 세파계에 이은 카바페넴계 차세대 항생제다. 피부조직 감염, 폐렴, 요로 감염, 급성골반 감염 등 다양한 세균성 감염증 치료에 사용한다. 광범위한 항균력과 내성균에 대한 우수한 효능으로 난치성 감염에서도 치료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중 갈등과는 별개로 제약바이오업계의 중국 진출 및 협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17일(현지시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2025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 USA) 기자 간담회에서 “중국 바이오 기업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파트너”라며 “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회장은 “글로벌 빅파마들은 중국 기업 파이프라인의 약 30%를 도입하고 있다”면서 “기업 입장과 정부 입장은 다르다. (미중 갈등이 있다고 해서) 한국 기업이 중국 기업과의 협력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다”고 피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