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75주년을 맞은 날 ‘김종필 증언록’(2016, 중앙일보)을 읽다가 우연히 그 시기와 마주쳤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증언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당시 김종필(1926~2018) 중위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상관은 군인이 아닌 문관 자격의 박정희(1917~1979) 작전정보실장이었다. 증언록은 ‘군 수뇌부가 6·25를 예견한 보고서를 묵살했다’는 잘 알려진 사실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1949년 12월 정보국은 방대한 분량의 ‘연말 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작성했다. 박정희 실장이 “여러가지 걱정스러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며 보고서 작성을 제안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 판단서는 전쟁 중 소실돼 남아있지 않다. 다음 내용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은”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적이 1950년 3월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하다. 다만 중국에서 편입될 동북 한인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이 늦어진다면 침략시점은 6월로 연기될 것.
-적은 동두천⇒의정부⇒서울 선에 전차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이 주공(主攻), 개성⇒파주⇒서울/ 춘천⇒원주⇒평택 선에 1~2개 사단이 조공(助攻)할 것.
-총병력은 최초 12만명, 서울이남 공격 단계에선 20만명 예상.
-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으나,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수 있음.
김종필은 “적의 침공 경로 등 주요 전략적 판단은 박정희 문관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의 정밀하고 조직적인 사고를 높이 샀다. 이 판단서는 서울의 육본 정보국 책상에만 앉아 작성된 건 아니었다. 옹진·개성·포천·강릉 등 10곳의 정보국 파견대 요원들이 보낸 북한의 남침 징후 보고에 토대를 둔 것이다.
판단서는 육군 참모총장을 거쳐 국방장관, 미국 군사고문단장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대부분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귀 기울이지 않았다.
6·25 하루 전인 6월 24일 토요일, 김종필은 당직 근무를 자원했다. “줄곧 경계하고 걱정해온 그날이 코앞에 닥쳤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오전 10시, 장도영 정보국장(대령)에게 육본 참모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상황실에 인사국장·작전국장·군수국장 등 주요 참모들이 모였다.
“적이 기습을 한다면 내일 같은 일요일 택할 것으로 판단된다. 전군에 비상태세를 취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전군 외출을 중지시키고 외출 장병은 부대 복귀토록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무슨 확증이 있냐”며 모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로부터 17시간 후인 25일 새벽 3시, 대대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오전 7시 전군 비상령이 내렸지만 물밀 듯 내려오는 북한군에 속수무책이었다. 결론적으로 김종필은 “6·25는 적이 기습남침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적을 알고서도 준비하지 않아 남침을 자초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증언록이 말한 종합적정판단서 기록이 남아있다면 더욱 생생한 증언이 되었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어제(24일) 육군이 6·25를 맞아 계룡대 육군기록정보관리단의 중요 역사기록물 복원사업 현장을 공개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6·25전쟁 군사기록물 8만1420점을 복원해 영구보존하려 한다.

김종필 증언록은 전쟁 당시 정보국 박정희 실장에 대한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박 실장은 1949년 2월 남로당 조직책 혐의를 받아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다행히 백선엽 도움으로 형 집행이 정지돼, 강제 예편(소령) 후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보국 동료들은 함께 일을 하고 있지만, 전쟁이 터지자 후퇴하면서 그에 대한 의구심으로 설왕설래했다. “남으로 갈 것인가, 북으로 갈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집결지인 수원국민학교 정문 앞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김종필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휴… 빨갱이가 아니었구먼.” 11년 후 그들은 합심해 5·16으로 정권을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