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에 대해 제가 얼마나 알겠어요. 그래서 더 많이 들으려고 합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를 연출한 이해영 감독이 26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애마’는 1980년대 한국을 강타한 에로영화의 탄생 과정 속,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어두운 현실에 용감하게 맞짱 뜨는 톱스타 정희란(이하늬)과 신인 배우 신주애(방효린) 이야기다.
작품 핵심은 ‘여성연대’다. “야만의 끝을 달리던” 사회 분위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따로 또 같이 저항하는 두 배우, 그리고 이들을 애정 어린 시선과 호쾌한 미장센으로 풀어냈다. 정작 50대 남성인 이해영 감독은 “겸손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애마’를 만들면서 가졌던 태도를 전했다.
지금이야 생경하지 않은 여성 중심 서사지만, 이 감독은 약 20년 전에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 어릴 적부터 남성과 여성이 톱스타로 누리는 입지가 각각 다르다고 느꼈고, 이러한 대비가 재밌었단다.
“미국을 예로 들면 섹시한 남자 가수는 미국을 대표하는 성조기 같은 이미지였다면, 당시 아이콘 마돈나는 음탕하고 타락한, 불온의 상징처럼 여겨졌었어요. 이젠 세상이 달라지고 제 시야도 넓어졌죠.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지금 ‘애마’가 탄생했죠.”
작품을 제작하면서 신경 쓴 지점은 작중 시대의 아이러니 표현이었다. “우민화 정책으로 성애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는 동시에 강력한 심의가 있었어요.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고, 성애적 요소도 허용되지 않았죠. 이 굉장한 모순을 잘 그리는 것이 시대를 담아내는 방식 아닐까 했어요. 그러려면 여성 캐릭터가 밸런스를 가지고 가는 것이 주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00% 동일하게 구현할 수는 없었다. “취재하다 보니까 당시 표현 방식이나 언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폭력적이고, 이런 분위기가 너무 일상적인 시대더라고요. 그래서 실재했던 것보다는 시청자분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정도로 톤다운하려고 했어요.”

자칫 과해지면 메시지 측면에서 작품 전체를 해칠 수 있는 노출신은 수위에 중점을 두고 기획했다. 고민 끝에 기준은 모티프인 ‘애마부인’에 뒀다. “성애 영화가 장려되던 시대였지만 심의가 강력해 구체적인 묘사가 불가능했어요. 그때 영화를 보면 너무 야하지 않아 놀라실 거예요. 실제 ‘애마부인’ 노출 수위에서 더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필수적인 베드신은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에 충실하려고 했어요. 여성의 욕망을 여성 입장에서 그린다는 느낌으로 보이게요. 행위보다는 눈빛 교환과 맞잡은 두 손 같은 것들이 중요했어요.”
‘애마’ 하이라이트는 신주애가 구중호(진선규)의 부조리를 폭로한 정희란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광화문을 질주하는 장면이다.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안긴 이 신은 “기획 단계부터 작품의 목적지”였다. 이해영 감독은 “이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출발한 이야기”라고 돌아봤다.
“‘애마부인’ 시그니처 이미지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모습인데, 남성 관객 욕망을 위한 장치로 사용됐죠. 이 이미지를 무협지처럼 다른 느낌으로 공격적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시대에 여성 캐릭터가 화려하게 입고 역주행한다는 게, 영화적인 순간이면서도 전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감독은 촬영 중 눈물을 흘리게 만든 보석 같은 신예 방효린, 기립박수를 치게 만든 진선규에 대한 찬사도 빼놓지 않고 전했다. 무엇보다 출연에 응해준 것은 물론, 둘째 출산이 임박한 가운데 작품 홍보에 참여한 이하늬에 대해서는 “남다른 사람”이라며 치켜세웠다.
“이하늬 씨가 거절하면 엎으려고 했어요. 그 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폴고(정희란을 뮤즈로 삼은 디자이너)의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편하면서도 자유롭게 노는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죠. 다 찍고 후반 작업을 할 때 둘째 소식을 들었어요. 공개일이 다가오는데 출산예정일도 다가왔죠. 그러면서 만삭의 몸으로 제작발표회에 등장하고, 작품 공개 다음날 진통이 시작되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고요. 너무 큰 감동이었어요.”
인간 이하늬가 아닌 배우 이하늬가 ‘애마’ 정희란으로서 주는 감동 역시나 크다는 전언이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만 주애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여전히 엿 같고 맨날 우리는 엿을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버티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시청자분들이 본인의 이야기라고 느끼시길 바라요. 그리고 ‘연기 차력쇼’라고들 하잖아요. 이하늬 씨가 정말 연기를 잘하셨어요. 씹어 먹습니다. 차력쇼를 보는 재미가 꽤나 있으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