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HL-GA)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구금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이번 사태가 ‘비자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전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과 함께, 비자 리스크가 장기화될 경우 국내 기업들의 대미 투자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대차‧LG엔솔 공장 건설 중단…업계 긴장 가중
8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삼성SDI‧SK하이닉스‧SK온 등 국내 기업 20여 곳이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들 기업 모두 미국에 공장을 건설 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주에 370억달러(약 46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원)를 투입해 반도체 패키킹 공장을 추진하고 있다. SK온은 114억달러(약 16조원)를 투자해 켄터키‧테네시 주 등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삼성SDI도 35억달러(약 5조원)를 투자해 인디애나 주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당국의 전례 없는 대규모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공장 운용에 차질이 생기면서, 미국 투자에 나선 국내 업계의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그동안 국내 기업 근로자들은 발급이 까다로운 취업 비자(H-1B), 주재원 비자(L1‧E2) 대신 ESTA(전자여행허가)나 B1(단기상용비자)을 취득해 미국 출장에 나섰다. 하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 무비자 근로 행위 등의 편법 활용에 대한 강력 제재에 나서면서, 힌국 기업들이 대대적인 대미 투자를 앞두고 인력 운용 및 대미 투자 위축 등을 우려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취업 비자를 발급받는 데 매우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 소요돼 단기 비자 활용을 통한 출장이 불가피했다”며 “비자 문제로 이러한 사태가 지속 발생할 경우 기업의 현지 생산이나 공장 건설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도 “그동안 국내 기업 근로자들이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 ESTA나 B1을 활용하는 관행이 이어져 왔었다”면서 “하지만 기존 관행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되면서 비자 문제 해결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새로운 비자 관리 체계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비자 문제 방치가 불러온 예견된 참사
일각에선 이번 대규모 한국인 구금 사태는 수십 년째 공전된 ‘한국인 미국 전문직 종사자 비자 쿼터 확대’ 문제가 불러온 예견된 참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부터 한국인을 위한 별도 전문직 종사자 비자 쿼터 설정을 요구해 왔지만, 법 개정 논의는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손상기 대진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자 문제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상황은 이미 예견된 문제였다”라면서 “정부가 이에 대한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 이후 한미 간 긴밀한 협력과 사전 대비책 마련은 필수적”이라며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체계적인 시스템 관리를 통해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이 함께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사태 일파만파…정부, '비자 체계 개선' 추진
정부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7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향후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산업통상자원부와 관련 기업 등과 공조 하에 대미 프로젝트 출장자 체류지와 비자 체계를 점검 및 개선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한국경제인협회와 공동으로 대미 투자기업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는 현대차그룹, LG에너지솔루션, 삼섬SDI, SK온,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미 투자 주요 기업들이 참석했다. 기업들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양자 협의를 통해 비자 발급 제도 개선 성과를 끌어내는 데 역점을 두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대미 투자 기업들로부터 수렴한 의견을 바탕으로 대미 투자 사업 진행을 위해 단기 파견에 필요한 비자 카테고리 신설, 비자 제도의 유연한 운영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국 당국과 협의를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