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권의 ELS 판매 재개 시점이 당초 예상보다 늦춰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은행들은 연내 재개를 목표로 준비해 왔지만 금융당국의 강경 기조와 과징금 불확실성에 재개 시점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과 국내 은행들은 고위험 금융상품 판매를 전담하는 ‘거점 점포’ 운영을 위한 시스템 정비와 실무 조율을 진행 중이다. 당초 정부 가이드라인은 전체 영업점의 10~15% 수준에서 판매 거점을 운영하는 방안이었으나, 은행들은 이를 30%까지 확대 신청한 상태로 확인됐다.
당국 사정에 밝은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권이 거점 점포 후보군을 취합해 제출한 것은 맞다”면서 “하반기 중 운영을 추진하는 계획 아래 금융당국과 협의를 이어가고 있지만, 일정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는 2021년 초 이후 판매 물량을 중심으로 지수 하락과 3년 만기 도래에 지난해 대규모 손실을 맞았다. 금융당국은 이 같은 사태 이후 불완전판매를 방지하기 위해 고난도 금융상품 판매 개선 방안을 마련해 지난 2월 발표했다. 인적·물적 요건을 갖춘 ‘거점 점포’에서만 고위험 상품을 취급하도록 한 것이 주요 골자다. 별도 전용 상담실을 갖추고, ELS 전담 직원을 반드시 배치해야 한다.
은행권 “판매 재개 시점 불투명”…금감원 강경 기조에 제동
ELS 판매를 중단한 국민·신한·하나·농협은행은 판매 재개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시점은 장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찬진 금감원장이 ELS 사태를 두고 연일 강경한 발언을 내놓으면서 일정이 더 늦춰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이 원장은 지난 9일 주요 금융회사 최고경영진과 만나 “지난해 홍콩 ELS 사태는 거버넌스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 사례”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28일 국내 은행장과의 첫 상견례에선 “더는 ELS 불완전 판매 등과 같은 대규모 소비자 권익침해 사례는 없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국민은행·신한은행은 당장 10월 재개가 어렵다고 밝혔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연내 재개를 목표하고 있지만, 점포 레이아웃 공사와 감독당국 현장 점검 등 절차가 남아 있어 10월 판매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신한은행 관계자도 “영업점 확정과 인테리어 등 준비가 필요해 빨라야 11월쯤 판매 재개가 가능하다”며 “ELS 판매로 얻는 수수료보다 향후 과징금 부담이 더 크기 때문에 성급하게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농협은행은 신중론을 내놨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현재 원금 보장형 상품(ELB)은 판매 중이지만, 투자 손실 위험이 있는 상품은 여러가지 내외 상황을 감안해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도 “판매 재개 시점은 관련 규정 개정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아직은 확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은행권은 감독당국의 최종 가이드라인과 제재심의위 결정을 주시하며 ELS 판매 재개 시점을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서는 내규만 바꾸면 판매는 가능하지만, 재판매라는 특수성 때문에 외부 규정과 법적 근거가 정비된 뒤 안전하게 판매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표준 투자자 보호 원칙과 금융투자협회 규정 개정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산정 기준 판매액으로 가닥…최대 8조 과징금 공포
은행권을 압박하는 또 다른 변수는 과징금이다. 현행 금융소비자보호법 제57조는 ‘위법 행위와 관련된 계약으로 얻은 수입, 또는 이에 준하는 금액의 50% 이내’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여기서 언급된 ‘수입’을 두고 은행의 ELS 판매금액으로 볼 것인지, ELS 판매를 통해 얻은 ‘수수료’로 제한할 것인지 해석이 엇갈려 논의가 지연돼 왔다.
최근 금융위가 판매금액 기준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은행권은 긴장하고 있다. 은행들의 홍콩H지수 ELS 판매금액은 약 16조원에 달한다. 단순 계산 시 최대 8조원을 과징금으로 토해내야 한다. 반대로 수수료를 기준으로 산정할 경우 총수입이 감소하면서 과징금 규모가 최대 수백억원 수준으로 떨어진다.
다만 금융권에선 조 단위 과징금 부과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은행들이 금융당국 권고에 따라 자율배상을 신속히 수용했고, 피해 보상의 90% 이상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과징금 조 단위 전망은 산술적으로 최대치를 가정한 것일 뿐”이라며 “배상 노력을 감안하면 제재 수위가 과도하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령 등에 따르면 피해 배상 정도에 따라 과징금 경감이 가능하다. 향후 열리는 제재심에서 은행권은 치열한 법리 다툼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과징금은 금감원 제재심 이후 금융위에서 최종 확정된다.
일각에선 최근 정부 조직개편 논의가 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금감원 관계자는 “조직 개편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ELS 관련 제재심의위 일정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