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조를 보건의료, 제약바이오 분야 전반으로 확장하는 가운데 글로벌 보건의료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미국이 세계보건기구(WHO)와 관계를 단절하고, 미국 내 의약품 제조 확대를 압박하는 등 자국 중심 정책을 강화하면서 국제 사회 협력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보건 안보 목표에 역행하며 공동체의 미래 펜데믹 대응력을 약화시키고, 보건 증진의 후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26일 의료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 확대로 세계 보건의료 체계가 상호 신뢰와 협력 대신 불신과 단절로 향하는 위태로운 흐름 속에 놓였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보건전문관을 역임한 한 국제보건 전문가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글로벌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의견에 반하는 미국 보건복지부(HHS) 장관과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글로벌 보건의료 및 공중보건에 대한 신뢰성을 무너트리고,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병의 창궐과 함께 의료에 대한 불신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그 영향이 미국 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세계적으로 파급성이 크다는 측면에서 우려가 된다”고 말했다.
WHO, 美 지원 끊겨 사업 규모 축소
시작은 트럼프 대통령의 WHO 탈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20일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WHO 탈퇴를 선언하고, 이틀 뒤 유엔에 탈퇴를 공식 통보했다. 이 조치는 2026년 초에 정식으로 발효될 예정이다.
미국은 WHO의 최대 분담금 국가로, WHO 정규 예산의 20%가 미국의 지원금으로 충당된다. 여기에 미국은 우수한 감염병·공중보건 전문가들을 WHO에 파견해 팬데믹 대응 등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분담금 납부를 거부했고, 전 세계 보건 프로젝트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을 포함한 미국의 대외 원조 대부분을 동결한 상태다.
WHO는 미국의 자금 지원이 끊기자 사업 규모를 축소하고, 제네바 본부를 시작으로 운영 규모 감축에 들어갔다. WHO는 지원 중단으로 2026~2027년 동안 최대 6억5000만달러(약 9109억원)의 급여 부족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의 WHO 이탈에 더해 여러 국가에서 방위비 증액을 위해 정부개발 원조를 줄이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미국의 WHO 탈퇴 직후 글로벌 보건 경고등이 켜졌다. WHO의 보건비상예산은 2년간 12억달러(약 1조6818억원)에서 8억7200만달러(1조2221억원)로 25% 축소될 전망이다. 실제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에 지원해오던 필수의료 서비스가 축소되며 167개 의료시설이 폐쇄됐다. 아프간은 출생 10만 건당 638명의 산모가 사망해 전 세계에서 산모 사망률이 매우 높은 나라 중 하나인 동시에 5세 미만 아동의 10%가 영양실조 상태, 45%는 성장 부진을 겪는 나라다.
‘백신 불신론’ 확산…홍역 감염자 속출
미국은 ‘백신 불신론’ 확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보건부 장관 자리엔 백신 불신론자로 꼽히는 인물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앉혔다. 지난 2월 말 미국 텍사스주에서 홍역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6살 아이가 숨지고, 3월 초 홍역 감염이 250건에 달한 것과 관련해 케네디 장관은 폭스뉴스에 출연해 “우리 어렸을 땐 다 홍역에 걸렸다. 생선 간유, 비타민A로 기적적 치료가 가능하다”며 백신이 아닌 대체요법을 권했다. 미국에서 홍역 사망자가 나온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다. 이후 4월 초 또 다른 어린이가 홍역으로 숨졌지만,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마저 “백신 접종의 잠재적 위험과 이점에 대해 알아야 한다”면서 사태의 위험성을 축소했다.

최근 논란이 확산하고 있는 ‘타이레놀(성분명 아세트아미노펜) 복용 임신부의 태아 자폐증 위험’ 발표도 케네디 장관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FDA가 의사들에게 관련 지침을 곧 통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발표는 임신부에게 타이레놀을 가장 안전한 진통·해열제로 권고해 온 기존 의학 지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파장이 쉽게 가라앉질 않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며 미국의 백신 정책도 급변하고 있다. HHS는 코로나19 백신 플랫폼으로 잘 알려진 mRNA(메신저리보핵산) 백신 개발과 관련된 5억달러(약 6948억원) 상당의 연구 지원과 계약을 취소했다. HHS는 지난 5월에도 제약사 모더나와 체결한 6억달러(약 8340억원) 규모의 mRNA 기반 조류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 계약을 철회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백신 책임자를 쫓아내고, 코로나19 추가 접종 정책을 비판했던 사람을 대신 앉혔다. 지난 6월엔 17명의 CDC 자문위원회 위원 전원을 빼고 대신 반(反)백신 단체 운동가들이 포함된 새 위원회를 꾸렸다.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를 연일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유엔 80주년 특별총회에 참석해 “미국은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강력한 경제, 국경, 군대, 우정, 정신을 지닌 축복 받은 나라”라며 자신의 통치하에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엔 ‘미국 우선주의 글로벌 보건 전략(America First Global Health Strategy)’을 발표했다. 이 전략엔 △더 안전한 미국 △더 강한 미국 △더 번영하는 미국의 세 가지 전략 목표가 담겼다.
의약품 최대 200% 관세 압박
글로벌 보건 협력·거래 빗장도 걸어 잠그고 있다. 정부가 우려하는 생명공학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생물보안법’을 재추진하고, 미국 내에서 생산하지 않은 수입 의약품에 최대 2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 현지 공장 인수로 활로를 찾고 있다.

국제보건 전문가는 “미국의 이러한 보호무역주의 기반 접근은 필수의약품의 글로벌 공급망을 교란시켜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며 “CDC와 국립보건원(NIH)의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은 신종 감염병 연구와 백신·치료제 개발 동력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WHO 탈퇴와 백신에 대한 미국의 접근은 보건 위기 대응 능력과 개발도상국 백신 공급이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글로벌 보건 위협을 가져올 수 있다”면서 “특히 과학적 근거를 불신하는 인사를 보건 리더십에 임명하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글로벌 공중보건 위기 대응 실패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한 것과 관련해선 “지난 25년간의 GAVI의 글로벌 예방접종 성과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백신 국가주의’는 팬데믹 발생 시 백신 생산과 공급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해 코백스(COVAX)와 같은 국제적 의약품 공동 구매·배분 메커니즘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라며 “통제되지 않은 감염병이 변이를 거듭해 다시 전 세계를 위협하는 글로벌 보건안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