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임신부의 타이레놀 진통제 복용과 자폐증이 관련 있다고 말해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임신부에게 타이레놀을 가장 안전한 진통·해열제로 권고해 온 기존 의학 지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파장은 더 크다. 의학계는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주장”이라며 임신부와 태아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반발했다.
23일 의학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신부가 고열이 없는 한 아세트아미노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하면 자폐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며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의사들에게 관련 지침을 곧 통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세트아미노펜은 타이레놀의 주성분이다.
주요 의료단체들은 오랫동안 아세트아미노펜을 ‘임신 중 가장 안전한 진통제’로 권장해 온 만큼 이번 트럼프 대통령 발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산부인과학회(ACOG)와 영국왕립산부인과 학회(RCOG) 등 주요 의학계는 현재 아세트아미노펜을 임신 중 통증과 발열에 사용할 수 있는 ‘1차 선택 약물’로 권고하고 있다.
이번 발표는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 보건복지부(HHS) 장관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케네디 장관은 지난 4월 “오는 9월까지 자폐증 유행 원인을 알아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는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백신 반대론자’로 알려져 있다.
이번 발표가 공식 정책으로 이어질 경우 공중보건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미 FDA는 “임신부가 타이레놀을 복용할 경우 자폐아를 출산할 확률이 높다”는 내용으로 아세트아미노펜의 라벨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FDA는 지난 2019년 존스홉킨스대 연구진이 임산부 제대혈 내 아세트아미노펜 농도가 높을수록 자녀의 자폐증 가능성이 2.14~3.62배, ADHD(주의력 결핍 행동장애) 가능성이 2.26~2.86배 높다는 관찰 결과를 이번 결정 근거로 삼았다.
다만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발표된 가장 큰 규모의 조사에선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사용은 자폐증·ADHD·지적장애 위험과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연구는 미국과 스웨덴 연구진이 미국 국립보건원(NIH) 지원을 받아 스웨덴 아동 248만 명의 건강기록을 분석한 결과다.
의학계는 트럼프 대통령 발표에 대해 즉각 반박에 나섰다. 임신 중 고열을 치료하지 않으면 오히려 심장 질환, 신경관 결손 등 심각한 태아의 선천적 장애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스티븐 플라이쉬만 미국산부인과협회 회장은 A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발표가 새로운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자폐와 발달장애의 원인은 복합적인데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복용만을 문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임신 초기에 열이 나서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한 경우라면 그건 필요한 조치였으며, 오히려 열을 치료하지 않는 게 더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의 자폐증 전문가 오드리 브럼백 박사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발표로 인해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이 근거 없는 의혹에 방어적으로 대응해야 하고, 부모들이 과학적 근거 대신 인터넷 발언에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타이레놀 제조사 켄뷰도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오히려 임신부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켄뷰는 “신뢰할 만한 연구들은 아세트아미노펜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 발표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날 출입기자들에 “미국 정부의 타이레놀 관련 발표에 대해 향후 해당 업체에 이에 대한 의견과 자료 제출을 요청하고, 관련 자료와 근거에 대해 신중히 검토해 나갈 예정이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