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우(牛)’에 획 하나를 더하면 ‘생(生)’이 된다. 우리는 그 생을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 작년 한 해 도축소 111만여 두. 평균 출하월령 42.3개월. 전년 대비 1.2개월이 더 짧아졌다. 숫자 앞에 생은 위태롭다. 누군가는 바닥에 일(一) 하나를 그어 소가 설 자리를 만든다. 새벽마다 쇠죽을 뜨고, 털을 빗기고, 걷게 한다. 강가에 앉힌 뒤 풀 뜯는 입을 오래 본다. 싸움소의 우주(牛主)들은 그 시간을 ‘동행’이라 부른다. 함성 없는 축사에서 소와 사람이 나란히 걷는다. 그 느린 걸음을 가까이서 기록한다. <편집자 주>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주름진 소 본 적 있습니까? 다들 일찍 잡아버리려고 하잖아요. 우리 깡패는 온몸에 세월이 묻어 있습니다.”
경남 진주시 외곽의 한 언덕. 한때 전국 대회를 휩쓸던 은퇴 싸움소 ‘깡패(16)’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천천히 풀을 뜯고 있다.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요즘 소들에선 보기 드문 선이다. 대개 주름이 잡히기 전에 생(生)이 끝나기 때문이다. 깡패의 얼굴에는 경기장에서의 긴장과 현재의 평온이 주름으로 나란히 남아 있다.
박성권(60) 우주(牛主)는 지난 달 12일 깡패가 모아온 트로피를 꺼내 보이며 “잠깐의 욕심 때문에 도축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1편: 한우 42.3개월에 도축…싸움소는 강가에서 풀 뜯는다
2편: “소 눈주름 본 적 있나요?”…‘천수’ 누리는 은퇴 싸움소
3편: 우(牛)플루언서 초롱이가 떴다…팬과 교감하는 소싸움의 미래
은퇴는 끝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
깡패의 하루는 단출하다. 아침에는 쇠죽(짚·콩·풀 따위를 섞어 끓인 죽)을 먹고, 긁개로 털을 빗은 뒤 주 3회 짧게 걷는다. 주말이면 경기장에 들러 관중과 사진을 찍고, 개회식 행렬에도 오른다. 박씨는 언덕 꼭대기에 가묘 터를 마련했다. 떠난 뒤에도 바라볼 자리를 미리 정한 것이다. 그는 “은퇴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책임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싸움소 한 마리에 들어가는 사료·건초·사일리지 등 기본 사양비는 월 30~40만 원이다. 여기에 톱밥·물·전기·차량·소독·백신·발굽관리 등을 더하면 100만 원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박씨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로 했다. “수백만 원 받자고 함께 보낸 세월을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싸움소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우주의 결심이 필요하다. 함께 쌓은 교감의 두께가 그 결심을 지탱한다.


경기장 밖에서 계속 불린 이름들
은퇴소의 사례는 깡패 이전에도 있었다. 2003년 은퇴한 청도의 ‘번개’는 청도공영사업공사 소싸움관리센터에서 지내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의령의 ‘범이’는 2009년 은퇴 후 주인의 보살핌 속에 여생을 보내다 같은 해 숨졌다. 하영효(86) 우주는 “내가 떠나면 범이 옆에 묻어 달라”고 할 만큼 깊은 교감을 전했다. 창원의 ‘강남스타’는 14년 현역 생활을 마친 뒤 각별한 관리 속에 우생(牛生)을 이어가고 있다.
김민재(36) 소힘겨루기대회 조교사는 “은퇴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싸움소로 등록을 유지한 채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그는 “반대로 등록이 말소·취소되는 경우는 내뿔 손상이나 다리 탈구 등 대개 회복이 어려운 질병과 중상 때문이며, 이때는 불가피하게 도축으로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천수 누리는 싸움소 많아져야
소가 물을 많이 마시면 ‘물러진다’는 옛속설이 있었다. 한때 우주들은 싸움소에 물을 아끼곤 했다. 박씨는 보란 듯이 축사 뒤 새로 만든 콘크리트 풀장을 가리켰다. 노쇠한 관절의 부담을 덜기 위해 여름철 수중 보행을 시킬 계획이다. 소싸움 문화도 변하고 있다. 요즘 우주들은 물가 훈련과 잦은 목욕으로 소의 컨디션을 조절한다. 박씨는 이런 변화의 종착점을 ‘여생 보장’으로 본다. “천수를 누리는 소들이 더 많이 나와야 진정한 동물복지가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