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형간염은 국내 간암 원인의 61%를 차지하지만, 치료 기준이 엄격해 간수치가 정상인 ‘회색지대’ 환자들이 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조기진단으로 치료 가능한 환자를 놓치지 않도록 치료 기준을 완화하고 급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은선 서울의대 교수(대한간학회 의료정책위원회 위원)는 20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간(肝)의 날 기념식 및 토론회’에서 국내 간질환의 주요 원인이 B형·C형간염인 점을 지적하며 “효과적인 관리와 치료 확대 없이는 ‘WHO 2030 간염 퇴치’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말했다. 올해로 26회째를 맞은 ‘간의 날’ 행사는 한국간재단이 주최하고 대한간학회가 주관했다.
간학회에 따르면 국내 인구 10만 명당 간암 사망률은 19.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간에 염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성 질환인 B형간염이 만성으로 진행될 경우 간경변이나 간암의 위험이 커질 수 있지만, B형간염 환자의 약 75%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진단 후 치료로 연계되는 비율은 40% 미만에 그친다.
가장 문제는 현행 급여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치료 대상에서 제외되는 환자들이다. 이른바 회색지대 B형간염 환자군은 간수치(AST·ALT)가 정상 범위이거나 바이러스 역가(HBV DNA)가 현행 급여 기준(2000IU/㎖)에 미달하는 경우를 말한다.
김인희 전북의대 교수(간학회 의료정책이사)는 “이들 회색지대 환자들이 장기적으로 간경변증과 간암으로 진행되는 비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한계로 인해 치료를 시작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며 “실제 연구에 따르면 HBV DNA ≥ 2000IU/㎖ 환자 전원에게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할 경우 2035년까지 간암 4만3000건과 사망 3만7000명을 예방할 수 있다는 분석 결과가 제시됐다”고 설명했다.
간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윤준 서울의대 교수는 “B형간염은 단순히 추적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조기치료로 간암을 예방할 수 있는 질환”이라며 “치료 확대가 국가 간질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B형간염 관리 강화 방안으로 △치료 기준 완화와 급여 확대 △진단-치료 연계체계 강화 △국가 차원의 장기 추적관리 시스템 구축 등을 제안했다.
C형간염 선별검사 확대 필요성도 제시됐다. C형간염은 감염자의 약 70~80%가 만성화되는 특징이 있다. 만성 C형간염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조기 발견이 어렵지만, 방치할 경우 20~30년에 걸쳐 15~51%는 간경변증으로 진행된다. 간경변증에서 간암 발생 위험도는 연간 1~5%에 달하며, 국내 간암 원인 가운데 C형간염이 10%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C형간염 검진·치료 환경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C형간염은 예방 백신이 없지만, 경구용 항바이러스제(DAA) 복용만으로 98% 이상의 완치율을 보인다. 또 올해부터 만 56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C형간염 항체검사가 국가건강검진 항목에 포함됐다. 하지만 만 55세 이하 환자들은 국가검진에 포함되지 않아 이 역시 회색지대에 머물러있다.
정숙향 서울의대 교수(간학회 회장)는 “C형간염 국가검진 도입은 WHO 2030 퇴치 목표 달성을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지만, 보다 광범위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전 국민 선별검사 확대와 치료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C형간염은 무증상 감염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조기 진단이 곧 예방이자 완치로 가는 첫걸음이다”라고 주장했다.
연구에 따르면 4년마다 전 국민 선별검사(수검률 80%)와 치료율 80%를 유지할 경우 약 18년 내 C형간염 퇴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또 C형간염 조기 진단·치료는 간경변증과 간암의 예방뿐 아니라, 감염 확산을 차단해 사회 전체의 보건의료비를 절감하는 효과가 입증됐다.
정 교수는 “국민 누구나 쉽게 검사받고 치료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야 진정한 간염 퇴치가 가능하다”면서 “우리 사회가 ‘치료 가능한 질환을 방치하지 않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