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란 화수분, 동나지 않는 이정은 [쿠키인터뷰]

‘일상’이란 화수분, 동나지 않는 이정은 [쿠키인터뷰]

영화 ‘좀비딸’ 주연 배우 이정은 인터뷰

기사승인 2025-08-01 06:00:08 업데이트 2025-08-01 10:28:56
배우 이정은. NEW 제공

“경동시장에서 채소 팔 때 제 안에 있는 악을 봤어요. 그런데 이런 점을 발견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본능적으로 ‘연기할 때 써먹어야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영화판으로 돌아왔죠. 여전히 내가 아는 나를 뛰어넘을 때마다 연기에 꼭 적용하겠다고 다짐해요.”

배우 이정은(56)에게 삶은 스스로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가 한결같은 연기 열정으로 배우로서 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이유다. 이번에는 할머니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좀비딸’에서 자신의 또 다른 얼굴로 너끈히 노역을 소화한 그를 최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좀비딸’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좀비가 된 딸 수아(최유리)을 지키기 위해 극비 훈련에 돌입하는 아빠 정환(조정석)의 이야기를 그린 코믹 드라마다. 극 중 이정은은 정환의 어머니이자 수아의 할머니 밤순 역을 맡았다. 이에 11살 어린 조정석과 모자 호흡을 맞추게 됐다.

“‘과연 보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는데,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렸어요. 할머니 분장을 해서 나이를 맞춰도 표정이 가리면 제가 의도한 느낌을 전달할 수 없거든요. (분장은) 조금 단순화해서 감정이 잘 표현됐으면 했어요. 그리고 제가 워낙 조정석 씨에 대한 믿음이 커요. 센스도 있고 상대의 창조성이 나오게끔 배려를 많이 해요. 그래서 케미스트리가 잘 맞았죠.”

밤순은 미디어에서 보편적으로 그리는 할머니와 달랐다. ‘넘버원’을 듣자마자 “보아 2집 타이틀곡”이라고 외치는가 하면, 놀이공원에 가는 손녀에게 직접 가수 선미의 메이크업을 해준다. 투애니원 ‘내가 제일 잘 나가’ 무대는 원곡자 못지 않게 에너제틱하다. 이정은은 칠곡 어머니들의 다큐멘터리를 레퍼런스로 삼으면서도, 밤순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으며 ‘K팝에 빠삭한 할머니’ 캐릭터를 구축했다.

“감독님이 칠곡 어머니들을 참고하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뵀었는데 흥이 되게 많으세요. 하지만 그분들의 삶에는 많은 슬픔이 있거든요. 제게 좋은 교과서가 돼주셨죠. 밤순이에게도 K팝은 어려움을 이겨낸 힘이었을 거예요. 만화적인 인물에 현실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지점이자 밤순이를 다른 할머니와는 다르게 만든 지점이에요. 사실 저도 제 또래 친구들보다 관심이 많아요. 이제 막 시작해서 노력하는 젊은 친구들과 작업을 많이 하고 싶거든요.”

배우 이정은. NEW 제공


이정은은 ‘좀비딸’로도 캐릭터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믿고 보는 배우’답게 자신을 향한 신뢰를 굳건히 지켜낸 셈이다. 대중의 기대는 늘 감사하지만 부담이 될 법도 하다. 그는 어깨가 무겁지 않냐는 물음에 “올초 드라마 수를 줄였다. 제가 갖는 무게가 좀 크더라.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너무 잘하려는 것 같았다”며 털어놨다.

“잘하려고 한다고 잘되는 게 아니잖아요. 즐겁게 작업을 하는 게 무게감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 때면 조금 내려놓으려고 해요. 지금은 재미있게 하고 싶어요. 계속 변주를 주고 싶기도 하고요. 좋아해서 시작했는데 좋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최초의 마음을 잃지 않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느덧 35년 차 배우가 됐다. 그중 약 28년은 무명 시절이었다. 빛을 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얼굴을 알린 후부터는 줄곧 전성기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일상성’의 힘이겠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대는 물론, 생계를 위해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면서 얻은 재료는 동이 날 기미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기 선배로서, 배우 개인으로서 이래저래 욕심이 생겨난단다.

“저도 연극판에 있다가 (매체) 조연을 하면서 성장해 왔는데, 동시대에 일하고 있는 배우들이 맡는 배역의 바운더리가 넓어질 수 있도록 꼭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제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친구들이 너무 많고요. 그런 점이 뿌듯하다면 뿌듯하죠. 저 혼자 이룬 건 아니지만요. 사실 요즘 부러울 때가 더 많아요. 전 작품 할 때 다른 사람 작품을 잘 안 봐요. 샘날까 봐요(웃음).”


심언경 기자
notglasses@kukinews.com
심언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추천해요
    0
  • 슬퍼요
    슬퍼요
    0
  • 화나요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