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금융권 대출을 제한하는 기준 마련에 착수했다. 현재 은행권은 기업 신용평가 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지만, 중대재해 여부는 별도 항목으로 명시하지 않은 상황이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출과 보증을 제한하는 등 ‘금융 페널티’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앞서 금융위와 금융감독원, 은행권 여신심사 부행장은 지난 1일 회의를 열어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중대재해기업 관리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는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중대재해를 (은행의 여신심사 평가시) 비재무모형 평가를 할 때 좀 더 강화하는 방법을 찾겠다”고 보고한 데 따른 후속조치다. 이 대통령은 “금융위의 제안이 재미있다”며 중대재해 발생기업에 경제적 제재를 강화하는 방안을 주문했다.
확인 결과 현재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 기업 신용평가 시 ESG 등 비재무 요소를 반영하고 있지만, 중대재해 발생 이력은 별도 평가 항목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 비재무 사유만으로 대출을 제한한 사례도 드물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중대재해이력은 신용평가 별도 기준은 아니지만, ESG 등 비재무 요소에서 간접적으로 반영된다”면서 “비재무 평가만으로 대출이 제한되지는 않지만,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쳐 금리나 한도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도 “사회적 책임 경영이나 평판 리스크 등 ESG 요소가 신용평가에 고려되고 있지만, 매뉴얼에 중대재해 이력이 단독 지표로 명시돼 있지 않다”며 “이 사유만으로 대출을 제한한 사례도 드물다”고 밝혔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역시 기업 신용평가 시 ‘경영위험’ 항목을 통해 중대재해 여부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정기 평가 외에도 수시평가를 통해 등급을 재조정하고 있으며, 중대재해 이력은 등급 하향의 사유가 될 수 있다”며 “기업 평가는 시스템 기반과 인적 심사를 병행해 종합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도 “경영위험, 윤리경영 등 비재무 항목에 중대재해 관련 요소가 포함될 수 있다”며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대출 금리 인상이나 한도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중대재해 여부는 비재무 평가 항목에 간접 반영되지만, 대출 심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며 “기본적으로 재무 요소가 중심이며, 전결권자 등 심사자의 판단이 일부 반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금융권의 불이익 조치를 강제 규정이 아닌 ‘가이드라인’ 형태로 추진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은행이 자율적으로 신용평가에 반영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 여신 내규에 어떻게 반영돼 있는지 현황을 먼저 파악한 뒤, 가이드라인 형태로 적용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가 공개하는 중대재해 발생 기업 목록이 평가 기준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중대재해 관련 형이 확정된 경우 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은 명칭과 지난 5년간 중대재해 발생 이력 등 정보를 공개하도록 돼 있다. 정책금융기관부터 여신 심사 시 중대재해 이력과 예방 노력 등을 평가에 반영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산업별 특성과 기업 규모에 따라 불이익이 과도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중소 제조업체의 경우 중대재해 발생 가능성은 높은 반면, 대응 여력은 부족해 신용평가에서 불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중소 제조업체는 대기업에 비해 중대재해 관련 대응 여력이 미비한 경우가 많은데,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면 대출 한도 축소 등 금융지원에 제약이 생길 수 있다”며 “산업 특성과 기업 규모를 감안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