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나날이 고도화하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막기 위해 은행권의 배상 책임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은행들은 법제화 시행 전까지 보이스피싱 대응책 보완에 힘쓰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책임을 은행권에만 전가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제기된다.
3일 은행권에 따르면 4대 은행(KB국민·하나·신한·우리은행)은 기존 보이스피싱 예방책을 점검하고 ‘무과실 배상 책임’ 법제화 대응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무과실 배상 책임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무과실 배상 책임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가 고객이 당한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 일부 또는 전부를 배상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간 은행권은 고객의 보이스피싱 피해에 ‘비대면 금융사고 책임분담기준’을 마련해 자율적으로 배상해왔다. 그러나 배상 범위가 비밀번호 위·변조로 인한 제 3자 송금·이체에 한정돼 이뤄지는 등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금융당국은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은행권의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는 개인이 예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체계와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무과실 배상 책임’의 취지를 설명했다.
실제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은 한층 정교해지고 있다. 범죄 조직은 딥페이크·음성변조 등 AI기술을 동원하거나 탈취한 개인정보로 피해자를 압박하는 방식까지 사용한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옛날에는 단순히 검찰청 사칭이 일반적이었다면, 요즘에는 AI로 목소리를 위조하거나 개인정보를 활용해 치밀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피해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임 교수도 은행권의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는 “보이스피싱 자금이 금융기관을 거쳐 이동하는 만큼 피해 예방 및 사후 대처에서 금융기관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며 “금융기관은 계좌 개설 및 자금 흐름 관리의 주체로서 앞으로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 관리·감독 체계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 “우리도 노력하고 있는데”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은 이미 보이스피싱 예방에 일정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민은행은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과 AI 보이스피싱 모니터링 시스템(VMS)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객의 금융거래 패턴과 자금 흐름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보이스피싱 징후를 탐지한다. 최대 1000만원 한도 내에서 피해액의 70%까지 보상하는 ‘LiiV M 피싱보험’도 시행 중이다.
하나은행은 이상거래를 분석 및 탐지하는 AI 기반 ‘신FDS’를 도입했다. 신FDS는 과거 범죄 시나리오 탐지 기능에 AI딥러닝을 결합한 지능형 시스템이다. 최신 사고 패턴을 신속하게 학습해 갈수록 고도화하는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에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하다.
신한은행은 ‘AI 이상행동탐지 ATM'을 전 영업점으로 확대해 운영 중이다. AI딥러닝으로 거래 패턴을 분석해 고객이 통화를 하거나 모자·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면 창에 경고 문구를 띄우는 방식이다. 이와 함께 금융안심보험제도를 도입해 고객에게 최소 300만원에서 최대 2000만원의 보이스피싱 피해금액을 보상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은행은 경찰청·금융보안원과 협력해 ‘보이스피싱 의심 해외계좌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해당 시스템은 영업점 방문 고객이 보이스피싱 의심 해외계좌로 송금을 요청하면 직원 화면에 경고 팝업창을 띄운다. 이를 통해 고객에게 위험을 안내하는 등 피해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또 ‘보이스피싱 보상보험’을 도입해 고객이 금전적 피해를 입은 경우, 최대 1000만원까지 보험금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은행권에서는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 법제화에 대해 “은행에게 책임을 지나치게 떠넘긴다”는 불만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예방 조치는 충분히 구축하고 있다”면서도 “고령층 피해자 상당수는 범죄 조직의 지시에 현혹돼 은행 직원의 도움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은행으로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배상액 및 기준을 정부와 계속 논의할 예정”이라며 “부디 배상액이 합리적인 수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