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도 감옥’으로 불리며 국내 환자 수가 약 100~150명으로 추정되는 극희귀질환 ‘한랭응집소병’이 별도의 상병코드도 없이 국가 관리 밖에 놓여 있다. 이러한 탓에 산정특례나 건강보험 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임상 가이드라인에서 권고되는 치료제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았지만, 가격 부담으로 인해 치료 접근성도 극히 제한되는 상황이다. 제도적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이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의료계에 따르면 한랭응집소병(Cold Agglutinin Disease, CAD)은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체내 적혈구를 공격해 적혈구 파괴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자가면역성 희귀질환의 일종이다. 한랭응집소라는 자가항체가 정상 체온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적혈구를 응집시켜 면역체계의 일부인 고전적 보체 경로를 활성화해 만성 용혈을 일으킨다. 적혈구의 세포막이 파괴되는 현상인 용혈은 대부분 혈관 외 용혈로 발생하지만, 급성 용혈 발생 시 혈관 내 용혈이 일시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
한랭응집소병은 빈혈과 혈전성 합병증을 유발하며 체온보다 낮은 온도에 노출 시 △일상생활이 어려운 극심한 피로감 △지속적 용혈에 따른 만성 빈혈 △호흡 곤란 △혈색소뇨증 △말단청색증 △혈전색전증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중 혈전 발병률은 1000명당 30.4명으로 비(非) 한랭응집소병 인구 1000명당 18.6명 대비 2배가량 높게 나타난다. 한랭응집소병 환자 가운데 약 72%는 첫 진단 후 1년 안에 중증 빈혈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랭응집소병 환자는 기온이 낮은 겨울철에만 증상이 악화되는 것이 아니다. 체온보다 낮은 에어컨 바람에 노출돼도 용혈성 빈혈을 겪을 수 있다. 특히 한랭응집소병 환자가 느끼는 피로감 수준은 류마티스 환자와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 환자가 경험하는 수준과 유사하다는 보고가 있다. 헤모글로빈(적혈구에서 산소 운반 역할을 맡는 단백질) 수치가 갑자기 3~4㎎/㎗까지 떨어지면 일어서지 못할 만큼 심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또 적혈구가 파괴되면 혈전(피떡)이 생기는데, 혈전이 주요 장기의 동맥을 막아서 심장마비, 뇌경색 등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병을 의심만 한다면 진단은 어렵지 않지만, 대부분의 한랭응집소병이 60~70대에 갑자기 나타나는 데다 환자 수가 적어 의료진조차 병을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한랭응집소병 환자 약 60%는 임상 증상 발현 후 1년 이내에 진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늦게 진단될 경우 생존 여명은 8.5년에 불과하다.
한랭응집소병 진단·치료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별도의 상병코드가 없어 ‘기타 자가면역성 용혈성 빈혈’로 분류돼 정확한 환자 수조차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치료법도 제한적이다. 응급조치인 수혈로 일시적 증상 완화를 기대할 수 있지만 반복적 수혈은 감염, 철 누적으로 인한 간 손상, 당뇨병 등 합병증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에어컨 바람과 찬 음식을 피하며 온도 변화에 대처하는 것 역시 한계가 있다.
한랭응집소병 신약인 ‘엔제이모’(성분명 수팀리맙)가 2023년 7월 식약처 허가를 받아 치료를 위한 길이 열렸지만,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사용이 어렵다는 점 또한 장애물이다. 고전적 보체 경로를 활성화하는 C1s 단백질을 표적하는 엔제이모는 한랭응집소병 치료에 허가된 유일한 약제로 미국과 영국 등에서 1차 치료 옵션으로 권고되고 있다.
엔제이모의 유효성·안전성은 임상을 통해 입증됐다. 임상 3상인 ‘CARDINAL’ 연구와 ‘CADENZA’ 연구 결과를 보면, 엔제이모 투약 초기부터 보체 활성 억제 효과와 빈혈과 용혈 지표 개선 효과를 나타냈다. 투약 3주 차에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유의하게 상승해 평균 11g/㎗ 이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빌리루빈 수치는 초기 평균 51±23umol/L이었으나 3주 이내 정상화됐으며, 치료 기간 동안 평균 빌리루빈 수치는 정상 범위 상한치 이하로 유지됐다.
환자 피로감이나 삶의 질 역시 엔제이모 투약 후 유의하게 개선됐다. 피로도 감소는 투약 1주 차부터 확인됐으며, 피로도 점수는 평균 32.5점에서 44.3점으로 전체 환자에서 평균 10.9점의 개선 효과를 보였다. 보고된 이상반응은 대부분 경증~중등도 수준이었으며, 수막구균 감염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다.
정부는 희귀난치질환에 대한 지원 확대를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산정특례 본인부담률 인하 △신약의 신속한 급여 등재 절차 마련 △환자 미충족 수요 발굴 및 대응 강화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제도에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랭응집소병 환자 지원책 마련과 함께 치료 접근성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장준호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한랭응집소병은 계절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용혈이 발생하며 빈혈을 유발한다”면서 “질병코드가 없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수혈은 일시적 증상 완화에 그치고 추가적 부담과 합병증을 초래할 수 있다”며 “소수의 환자라도 우리 국민이기 때문에 국가 책임 아래에서 관리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오는 16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별실 182호에서 한랭응집소병 환자의 질병 부담과 치료제 접근성을 논의하는 ‘희귀질환자의 건강권 보장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 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가 개최된다. 이번 토론회는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하고,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쿠키뉴스가 주관한다.
‘국내 희귀질환자 치료 환경 및 건강권 보장 현황’을 주제로 장준호 교수가 발제를 하고, 한랭응집소병 환자 사례가 소개될 예정이다. 패널토론은 최영현 미래건강네트워크 이사가 좌장을 맡았으며 △정진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사무총장 △김연숙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장 △김국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관리실장 △신대현 쿠키뉴스 기자가 토론자로 나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