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정책 서민금융은 위기 완화에는 일시적인 도움을 주겠지만 장기 회복에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서민금융 지원제도 개선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나온 말이다. 정책 서민금융이 양적 성과주의에 매몰돼 ‘빚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전문가들은 ‘이용자의 삶을 얼마나 개선했는가’라는 질적 관점으로 정책 서민금융 제도를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은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 설립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정책상품에 대한 단순 컨설팅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제는 금융취약계층을 정확히 분류하고, 적시에 적절한 대상에게 꼭 필요한 금융지원을 제공하는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과 공공이 긴밀하게 연계해야 한다”며 논의의 장을 열었다.

10년째 제자리걸음…금융과 복지 사이 길 잃은 서민금융
임수강 민주노동연구원 정책자문위원은 이날 기조발제를 통해 서민금융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소금융’, ‘햇살론’ 등 상품을 내놓으며 적극적인 자금 공급에 나섰다. 2016년에는 통합기구인 서금원까지 출범시켰다. 하지만 서금원 출범 이후에도 금융 취약계층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임 위원의 진단이다.
임 위원은 “단순히 대출을 해주는 것만으로는 금융배제 계층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없다”며 “정책 상품을 이용한 뒤에도 추가 대출과 재대출을 반복하다 결국 채무조정이나 파산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현장에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문제 원인으로는 △금융배제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량 △금융기관 출연금에 의존하는 재원의 불안정성 △금융배제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대형 금융기관의 소극적 참여 △정체성에 맞지 않는 서민금융기관의 행태 등을 꼽았다.
임 위원은 문제 해결을 위해 성과 평가 기준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기존의 공급 규모나 건수 위주의 양적 지표가 아니라, 수요자 중심의 질적 지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시된 핵심 지표는 △도달률(필요한 사람에게 닿았는가) △적시성(제때 집행됐는가) △지속성(지원 후 상환과 생활 안정이 유지되는가) △형평성(배경에 따른 차별은 없는가) 등 4가지다.
임 위원은 “총괄기구가 여러 상품을 안내하는 단순한 ‘표지판’을 넘어, 상담부터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길잡이’로 기능해야 한다”면서 “입구는 하나로 단일화하고, 이용자 상황에 맞는 명확한 기준으로 경로를 연결해 이를 뒷받침할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관 간 ‘핑퐁’ 그만…신복위가 ‘허브’ 돼야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정장호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신용회복위원회지부 지부장은 파편화된 채무조정 제도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는 법원의 개인회생·파산, 신복위의 워크아웃, 새출발기금과 같은 정책적 채무조정이 서로 연계되지 않고 “다소 경쟁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특히 코로나19 피해 소상공인을 지원했던 새출발기금의 사례를 들며 현 제도의 한계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정 지부장은 “새출발기금은 단기 연체자는 신복위가, 장기 연체자는 자산관리공사(캠코)가 맡는 이원화 구조로 운영됐다”며 “이로 인해 신청 단계부터 기관별 기준이 달라 수요자 혼란이 발생했고, 채권매입과 중개 형식이 전환되는 과정에서 기관 간 ‘핑퐁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과거 2년간 38만명을 지원했던 국민행복기금에 비해 새출발기금은 2년9개월간 약정 체결이 8만 명에 그치는 등 실적이 저조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단순한 물리적 결합을 지양하고, 각 기관의 역할을 수직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며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했다. △법원은 최고 결정기관으로, 캠코는 채권 매입을 통한 불법 추심 방지에 집중하고 △신복위가 그 중심에서 행정부와 법원, 금융회사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허브’가 되어야 한다는 구상이다.
정 지부장은 “이 같은 유기적 연결이 이어지면 채무자는 더 낮은 비용으로 자신에게 맞는 제도를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단순 채무 감면에만 치중된 현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채무자 보호와 재기 지원, 채무 문제 예방까지 아우르는 종합 지원체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연체 우려 때부터 개입하고, 현장 인력난 해소해야”
기조 발제에 이어 진행된 토론에서는 서민금융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제언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채무조정의 시작 시점을 앞당기는 방안과 현장의 고질적인 인력난 해소, 파편화된 제도의 통합을 핵심 과제로 꼽았다.
전성인 전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채권금융회사 단계에서의 채무조정 원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놨다. 현행 개인채무자보호법은 ‘연체가 발생한 이후’에만 채무조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전 교수는 “연체가 발생한 후에는 실익이 현저하게 감소하고 개인채무자 보호 효과도 훼손된다”면서 “채무조정 요청 시기를 ‘개인금융 채무자가 채무 상환에 어려움을 겪어 연체 우려가 있을 때’로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상임대표는 채무조정 이후의 삶에 주목했다. 김 대표는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을 넘어 낚시하는 법도 알려줘야 한다”며 신복위를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재기 지원 시스템을 촉구했다. 김대성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 역시 “양분화된 상담창구를 일원화하고 절차를 간소화하고 사후관리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면서 힘을 실었다.
현장의 목소리는 더욱 절박했다. 두시웅 서금원지부 부지부장은 “전국종합 상담 인력은 1~2명에 불과하고, 수요가 몰리면 2주 이상 대기해야 한다”며 고질적인 인력난을 지적했다. 상담사들이 상환 의지나 자활 계획 등 정성적 요소를 충분히 포착할 수 없는 환경이란 설명이다. 두 부지부장은 “그 결과 지원은 빠르게 집행되지만, 재대출과 추가 대출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며 상담사 평가 기준을 승인 건수가 아닌 재기율, 상환 유지율 같은 질적 성과로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금융당국은 제도 개선 의지를 밝혔다. 목정민 금융위원회 서민금융과 사무관은 “상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인력을 확충하고, 상담 체크리스트를 표준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금융 정보 외 기준을 활용한 대안적 신용평가 모델 도입도 중요한 해결책”이라며 “서민금융안정기금 설치법이 통과되면 안정적 재원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